들국화 핀 가을날

작성일2018-03-18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습니다.
울고 있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한동안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워 얼른 뒤 돌아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내 이마 위로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지들 중에는 ‘왕주먹’이라는 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포악하기가 이를 때 없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물론 거지들도 왕주먹 그림자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왕주먹과 함께 사는 거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왕주먹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하루는 내가 양지편을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거지 한 명을 만났습니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다리 위 한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숨을 죽이며 울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담배 연기처럼 헝클어진 아이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그 아이가 무서워 보였지만 한편 불쌍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습니다. 울고 있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한동안 저를 노려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워 얼른 뒤 돌아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내 이마 위로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 잠 자리에서 나는 외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있잖아, 오늘 양지편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다리 위에서 거지 아이를 만났어. 왕주먹한테 매를 맞았는지 코피를 흘리며 울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아이에게 손수건을 줬거든. 저 번에 우리 집에도 왔었던 아이야. 나 잘했지, 할머니?”
“정말 잘했구나.”
할머니는 제 얼굴을 감싸주며 말했습니다.
“거지들은 정말 불쌍한 거 같아. 엄마, 아빠도 없고 왕주먹한테 맨날 매만 맞고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왕주먹인가 하는 사람은 어째서 그 어린 것들을 맨날 때리는지 모르겠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가엾은 것들….”
할머니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웬만하면 너도 양지편 다리로는 다니지 말거라. 혹시라도 그 아이들이 너한테 해코지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알았지?”
“그래도 양지편 다리로 가지 않으면 멀리 돌아가야 하잖아.”
“그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혹시 모르니까.”
“알았어. 할머니.”
“이제 그만 자거라.”
“할머니도 어서 누워.”
“알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자리에 누워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웃마을로 갈 채비를 했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시킨 대로 양지편 다리 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웃마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양지편 마을 다리를 건너지 않고 안골 마을 쪽으로 멀리 돌아왔습니다. 곱게 단풍이 들어가는 가을 산의 풍경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내가 외갓집 사립문을 들어서는 순간 사립문 한 쪽에 들꽃과 함께 분홍빛이 아주 흐릿하게 남아 있는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습니다. 손수건은 곱게 개어져 있었습니다. 하루 전 양지편 다리 위에서 만난 거지 아이에게 주었던 손수건이었습니다. 손수건 위에는 향기 가득한 노란색 들국화가 한 다발 놓여 있었습니다. 무섭기만 했던 그 아이의 얼굴을 자꾸만 떠올리며 나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철환 (소설가)

작품으로는 430만 명의 독자들이 읽은 <연탄길 1,2,3>과 <행복한 고물상>과 <위로>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등 총 23권이 있다. 작가의 작품 중 총 10편의 글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뮤지컬 연탄길 대본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책 수익금으로 운영해 온 ‘연탄길 나눔터 기금’을 통해, 낮고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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