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작성일2017-08-02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평정하여 법과 질서에 의한 평화를 성취했다고 자랑했으나 지배하는 권력이 커지면 그에 저항하는 세력도 커지게 마련이었다. 유대에서 열심당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팍스 로마나’가 전개되고 있던 AD 6년이었고, 그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의 시대에도 강도가 횡행했다. 그 시대에 나온 예수의 비유에도 강도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강력한 황제 네로의 시대에도 강도가 들끓었다. 사도 바울은 AD 56년에 쓴 것으로 알려진 편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썼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 11:26).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의 두 번째 반란은 아직 네로가 황제로 있던 AD 66년에 일어났다. 게시우스 플로루스 총독이 유대인의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AD 6년에 열심당 폭동을 주도했던 유다의 아들 므나헴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반란을 주도했다. 4년이나 끈 이 반란은 AD 70년 티투스 장군이 포위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참혹하게 파괴하고서야 끝났다. 유대의 세 번째 반란은 ‘오현제’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제위에 있던 AD 131년에 터졌다. 예루살렘에 이교 사원을 세우려는 황제의 계획에 분노하여 일어난 이 반란의 주동자는 바르 코크바(Bar Kokhba)였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일어난 반란군은 로마군 22군단을 전멸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각 지방에 행정관을 보내서 관할하며 치안을 유지했다.
반란군이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구원 제1년’을 선포하자 황제는 집정관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함께 출정했다. 로마군이 50개의 요새를 점령하고 985개 마을을 파괴하자 반란군은 AD 135년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베델 요새로 쫓겨갔다. 세베루스의 로마군은 공성벽을 쌓아 베델 요새를 돌파하고 바르 코크바와 그의 잔당들을 살육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네로 이후 줄곧 내부의 도덕적 퇴폐와 속주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로마 제국은 AD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집권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과 결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89년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알코올 중독에서 구해내려면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본 것과 같은 것이었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AD 30년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시작하여 복음의 전도자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핍박하던 유대인들은 로마에서도 황실의 권력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몰아내려 공작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유대인 추방도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추방되었고 유대인들은 무관했으며, 네로 시대의 화재에도 역시 그리스도인들만 방화범으로 몰렸고, 유대인들은 안전했던 것이다.

해적의 부활


가는 곳마다 핍박을 당하던 기독교가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한 ‘기독교 공인’으로 갑자기 로마 제국을 이끄는 통치 이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 제국의 도처에 성당이 들어서고, 로마 제국의 도로를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2~33).
로마 황제의 후원을 받게 된 교회는 사도 요한이 예고했던 천년 왕국이 온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국의 재건에 기여한 기독교가 내부로부터 부패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에 밀리게 되었고, AD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약탈을 당한 이후로 제국은 해적의 놀이터가 된다. 이슬람의 사략선 역할을 한 코르세어 해적은 종교가 다른 나라들의 선박을 약탈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해적 행위를 그들의 종교와 영토 팽창에 유익한 확장 수단으로 생각했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결국 ‘팍스 로마나’는 내부로부터 일어난 타락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잔틴왕실은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해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비잔틴 왕실과 에게 해 해적들과의 꾸준한 거래는 그리스 바다에 혼란을 초래했다. 해적들 대부분은 이탈리아인들이었으며,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와 게누아의 상인 세력은 상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해적을 이용하여 무질서라는 완충지대를 만들어낸 것이다.”(<해적의 역사>)
결국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온갖 수난과 희생 감수해가며 활동했던 기독교가 해적을 부활시키는 일에 기여한 셈이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소탕한 이후 지중해의 여러 구석에서 은밀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그들 세력을 비잔틴 제국이 그 해로를 지키기 위해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바다의 큰 세력으로 부활시키게 된 것이다.
북유럽의 바다에서 활동하던 스칸디나비아의 해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AD1241년 함부르크 등 독일 도시들은 ‘한자 동맹’을 결성했고, 독일의 해적단 ‘비틀형제’는 한자 동맹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영국 해협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선들을 공격하는 영국 해적 ‘존 홀리’, ‘헨리 페이’ 등이 있었고, 북 아프리카 해안에는 이슬람과 협조하는 ‘바르바리’ 해적이 있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중세 해군의 전함은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이었고, 해적들은 갤리선을 축소하여 삼각돛을 단 ‘갤리엇’이라는 쾌속정을 선호했다. 날렵하고 빠른 갤리엇 해적선은 이슬람 세력이 중세의 바다를 장악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해골의 깃발


해적의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에 흔히 나오는 것이 해적선에 걸려 있는 특이한 깃발이다. 검은 바탕에 그려진 해골의 아래를 X자 형으로 교차시킨 대퇴골의 뼈가 받치고 있다. 카리브 해에서 스페인 보물선을 습격하던 버커니어들은 처음에 나포 면허를 가진 ‘사략선’임을 나타내려고 모국의 국기를 달았으나 차츰 붉은 바탕에 해골을 그린 해적기를 달게 되었다.
“졸리 로저(해적기, Jolly Roger)는 프랑스어로 예쁜 붉은색을 의미하는 졸리루즈(Jolie Rouge)에서 유래한 것이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붉은 색의 해적기를 검은 색으로 바꾼 것은 AD 1700년 프랑스 사략선 출신의 해적 에마누엘 윈이 처음이었다. 검은 색으로 공포를 일으키고 해골로 죽음을 상징하여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색 해적기의 출현과 함께 먼저 들려온 소식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해적선장윌리엄 키드(Kidd, 1645~1701)가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브 해와 신대륙의 동해안에서 해적들의 활동은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40문의 대포로 무장한 ‘앤 여왕의 복수’호를 이끌며 해적 동맹까지 결성했던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Teach, 1680~1718)는 버지니아 총독이 출동시킨 해군과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여성 해적으로 유명했던 앤 보니는 1720년 체포되어 이듬해에 감옥에서 죽었다.
미남 해적으로 유명했던 바르톨로뮤 로버츠는 카리브해에서 4백 척의 배를 약탈하고 나포한 배마다 ‘로열 포천’호라고 명명하여 추격선을 따돌렸으나 1722년 영국 전함 ‘제비’호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바하마의 뉴 프로비던스를 기지로 활동한 해적 찰스 베인은 부하 잭 래캄에게 축출된 후 태풍으로 조난 중에 구출되었으나 해적임이 발각되어 1720년 처형되었다.
해적들은 주로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는 ‘보물 사냥꾼’이었으나 ‘해적 사냥꾼’도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 사략선의 선장으로 스페인 상선들을 나포, 약탈하던 우즈 로저스(Rogers, 1679~1732)는 1717년에 바하마 총독이 되었다.
1681년 ‘포트 로열’에서 반해적법에 의한 해적들의 처형이 시작되자, 바하마의 ‘뉴 프로비던스’가 새로운 해적의 소굴로 부상하고 있을 때였다.
영국 해군 전함 3척을 이끌고 부임한 로저스 총독은 대대적인 해적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해적들은 거의 모두가 해전과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두목급 해적의 시신은 쇠창살로 만든 틀 속에 끼워져 처형장의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갈매기와 벌레들이 시신을 다 쪼아 먹어 백골만 남은 후에도 2년가까이를 매달아 두어 우범자들에 대한 경고용으로 사용했다.
“우즈 로저스는 해적 사냥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바하마의 해적 소굴을 소탕하고, 해적의 황금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로저스의 시대에 해적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고, 스페인의 보물 함대는 1778년에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2천여 명의 해적이 들끓었던 뉴 프로비던스의 ‘포트 나소’는 해적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레스토랑, 술집 등을 관광자원으로 해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적 행위가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해적선은 사라졌으나 카리브 해에는 수백 척의 사략선이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실직한 사략선 선원들이 다시 해적으로 변신했고, 미국은 1821년 반해적 함대를 창설했다. 데이비드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쿠바의 해적 기지들을 소탕했다. 1807년 중국 남해안에서는 정을(鄭乙)의 해적 연합이 정크선 5백 척에 15만 명 규모가 되었다.
정을이 죽자 그의 아내 정일수(鄭一嫂)가 조직을 이끌었다.
동남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적은 필리핀의 일라눈 해적과 보르네오의 발라니니 해적이었다. 수마트라의 아트제 해적과 리아우 해적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네덜란드 선박과 영국 선박들을 약탈했다. 영국 함대가 이들 해적의 소탕을 담당했으나 이 지역에서의 피습은 계속 발생했다. 특히 말라카 해협의 해적은 최근까지도 그들의 존재를 빈번하게 과시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아프리카 수역의 해적 행위가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식민 통치가 끝나면서 쿠데타, 내전, 수역 분쟁의 발생으로 여러 나라들이 내전사태로 빠져들었다. 특히 소말리아 해적 때문에 인도양과 홍해는 통과 선박들의 위험 수역이 되었다. 소말리아 해적은 아덴만에서 유조선까지 납치하는 대담성을 보였고, 한국 해군도 이 지역에 함정을 파견했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넘치나이다”(시 69:2).
특히 여러 나라가 수중 자원 개발을 위한 수역 확보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계의 바다는 또 다시 거센 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시 69:3).
국가 간의 분쟁으로 바다가 혼란 상태에 빠지면 국가가 묵인하는 해적의 활동이 증가될 수도 있고, 바다의 혼란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강대국이 나설 경우에 로마 제국처럼 합법적인 약탈자가 되어 다시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수도 있다. 선한 자들은 그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6).†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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