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㉜|어둡고 캄캄한 날이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크고 은밀한 일을 계획하시고 시행하실 때에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그러나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은밀한 일은 언제나 그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사 41:4). 그러나 끝은 그저 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다시 이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날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가장 큰 것을 꼽는다면 그 하나는 대홍수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린 날일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세상에 오신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대홍수가 날 때 역시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세상에 오시는 큰 사건이 임박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선지자를 통해 징조와 예표를 보여주시고, 경고와 권면의 말씀을 주셨으나 BC 450년경 ‘나의 사자’라는 뜻을 지닌 ‘말라기’라는 이름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끝으로 그분과의 소통은 단절되었다.

깨닫지 못하더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6).
말라기 선지자가 그 마지막 말씀을 전하기 385년 전인 BC 835년에 요엘 선지자가 이미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을 예고했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욜 2:1~2).
그리고 세상은 마침내 그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이 어둠인 것조차도 알지 못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마지막 말씀을 전했던 BC 450년에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던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바사(Persia) 제국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 아닥사스다Ⅰ세가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스 7:12~13).
그러나 바사는 이미 그 전성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바사의 전성기는 아닥사스다Ⅰ세의 부친인 아하수에로왕 때였다. 바사 식 이름으로 크샤아르샤, 헬라식으로는 크세르크세스인 아하수에로는 고레스 왕의 아들 캄비세스Ⅱ세가 죽어 왕위를 물려받은 다리오Ⅰ세의 아들이었다. BC 485년 그 다리오Ⅰ세가 죽어 아하수에로가 왕이 되었다.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에 1:1~2).

그는 5년 뒤인 BC 480년 바사의 함대를 이끌고 헬라를 침공했다. 10년 전 그의 부친 다리오Ⅰ세가 헬라를 공격하다가 ‘마라톤’에서 패전한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바사군은 아테네까지 점령하여 승전하는 듯 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헬라연맹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헬라 정복의 야망을 영원히 접어야 했다. 그 후에 실의에 빠진 아하수에로 왕을 미혹하는 간신이 나타났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에 3:1).
총리가 된 하만의 조상 아각은 사무엘이 죽인 아말렉 족속의 왕(삼상 15:33)이었고, 아말렉 족속은 모세 때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다(출 17:16). BC 473년 하만은 모든 속주의 유다인을 죽이라는 왕의 승인과 권한을 받아냈으나, 유다 출신인 에스더 왕비의 역습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하만과 그의 열 아들이 다 나무에 달렸고, 그가 유다 백성을 죽이려 했던 날은 ‘부림절’이 되었다.

BC 465년에 즉위한 아닥사스다Ⅰ세는 유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BC 458년에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를 예루살렘에 보내 속죄제를 드리게 하고 성전의 모든 제도를 회복하게 했으며, BC 445년에는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보내 예루살렘의 훼파된 성곽들을 복구하게 허락했다. 그러나 유다 밖의 세계는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전에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놋’의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단 10:20).

마게도냐 왕 빌립Ⅱ세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산더는 13세 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BC 336년 20세 때 부친의 왕위를 계승한 그는 BC 333년에 애굽을 점령했고, BC 331년 마침내 바사를 정복해 바사 왕을 자칭했다.
“털이 많은 숫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단 8:21).
그는 에스겔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두로’를 파괴했다.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7).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헬레니즘의 수호자를 자처한 알렉산더는 그가 점령한 나라들의 문화와 종교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알렉산더는 대제사장의 안내로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존중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1~8)
알렉산더는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더스 계곡까지 진출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대제국의 수도를 바벨론으로 정했으나 BC 323년 그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이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네 뿔이 났은즉”(단 8:22).
알렉산더가 죽은 후 ‘헬라’는 카산더가 차지한 마게도냐, 리시마쿠스의 비두니아, 톨레미의 애굽, 셀루코스의 수리아 등 네 왕국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도 권력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히람 시대에 무역으로 지중해를 휩쓴 ‘두로’는 북 아프리카에 ‘카르타고’를 건설하여 막강한 해군력으로 제해권을 장악했으나 BC 509년 민회 주도로 공화정을 시작한 ‘로마’가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단 2:40
BC 218년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제압한 로마는 점차 알렉산더가 확장해 놓은 헬라의 지경들을 넘보기 시작했다.

언약을 깨뜨리면
알렉산더의 영토를 나눠가진 네 왕들 중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것은 애굽의 톨레미 왕조와 수리아의 셀루코스 왕조였다. 두 세력은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늘 충돌하다가 톨레미Ⅱ세가 딸 베레니카를 수리아의 안티오쿠스Ⅱ세와 결혼시키면서 그 관계가 호전되는가 싶더니 그녀가 수리아에서 살해되면서 다시 악화되었다.
“그 공주의 본 족속에게서 난 자 중의 한 사람이 왕위를 이어 권세를 받아 북방 왕의 군대를 치러 와서 그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쳐서 이기고”(단 11:7).
그러나 BC 202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Ⅲ세는 애굽에 속해 있던 팔레스틴을 점령했고 유다도 수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유다에 본격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날’이 임한 것은 안티오쿠스Ⅳ세 때였다. BC 168년에 애굽으로 진격한 그는 로마의 견제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했고 그 이듬해에 다시 유다 백성의 종교에 대한 큰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왕은 하나님의 단 위에 이방의 제단을 세우고 거기서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섬기는 신들을 경배하도록 강요했으며 모든 도시와 마을에도 그리 하라고 명령했다. 또 남자 아이들의 할례를 금하고, 지시를 어기는 자는 산채로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며, 율법서를 소지한 자들도 모두 살해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2~5)
BC 166년 모데인의 제사장 마따디아는 안티오쿠스Ⅳ세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를 따라 나서시오.”(마카비 상 2:27)
그 계약이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말 2:5).
그러나 레위인과 유다 백성은 이미 그것을 깨뜨렸고,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말 2:8).

비록 늦기는 했으나 마따디아의 군대는 나름대로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티오쿠스 쪽에 부역한 자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했고, 제우스의 제단을 제거하고, 할례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 할례를 행했다. 마따디아는 항전 중에 지휘권을 유다 마키비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수리아 군을 쫓아내고 유다 온 땅을 되찾았다.
“기슬래 월 즉 구월 이십오일 이른 아침에 그들은 일찍 일어나 율법대로 새로 만든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바쳤다. 이방인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노래와 비파와 퉁소와 꽹과리로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했다.”(마카비 상 4:52)
그것이 곧 BC 164년 12월 14일의 수전절(修殿節, Hanuka)이었다. 성전을 회복한 유다 마카비는 안티오쿠스Ⅳ세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데메드리오Ⅰ세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마카비의 후계자인 막내 아우 요나단마저 죽자 유다의 지도자 회의는 마따디아의 아들 중 생존해 있는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시몬을 영구적인 지도자 및 대제사장으로 삼는다. 시몬은 유다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어 성전을 관리하고 온 국민의 활동을 감독하며, 나라와 무기와 요새를 장악할 것이다.”(마카비 상 14:41~42)
이후로 대제사장 직은 시몬의 가계에서 세습되었고, 그 가문은 조상의 이름을 따라 ‘하스몬 왕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요한 힐키누스는 에돔 족속 즉 이두매를 병합하고 그 백성을 강제로 개종시켜 할례를 받게 했다. 그의 이런 포용 정책은 후일 유다를 통치하는 이두매 출신 ‘헤롯’ 가문을 등장시킨다. 헤롯 가문을 일으킨 인물은 카이사르가 유다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한 안티파테르였다.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롯은 부친에 의해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어 로마의 지도층과 접촉을 시작했고, BC 37년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그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잽싸게 그에게 붙어 유대 왕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자기 모친과 누이가 아내 마리암네의 스캔들을 꺼내 말하자 아내를 처형했다.
“정숙하며 당당하기까지 했던 위대한 여인 마리암네는 이같이 세상을 떠났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5~7)
이 때부터 헤롯은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마리암네와 사이가 나빠 비방했던 그녀의 모친 알렉산드라를 잡아 처형했다. 헤롯은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건설 공사에 매달렸다. 그는 사마리아를 재건해 황제의 성 즉 세바스테라 했고,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해 황제에게 헌정했으며 극장과 원형 경기장, 경마장 등을 건설해 5년마다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경기를 개최하게 했다.
“헤롯은 재위 제18년(BC 20)에 매우 거대한 공사 즉 하나님의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5~11)
그가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철거하고 솔로몬 시대의 성전을 복구하는 큰 공사를 시작한 것은 이두매 출신인 자신을 곱지 않게 보는 유다 사람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 대형 공사는 그것을 완공하는데 46년이 걸렸다. 그러나 발작적인 그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고, 마리암네 소생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루스가 다투자 그들에 관해 참소하는 이간자들의 말에 쉽게 넘어갔다.
“헤롯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루스가 부친 헤롯의 명에 따라 세바스테로 끌려와서 처형되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6~11)
BC 7년 자신의 두 아들을 처형한 헤롯은 BC 4년 전처 도리스 소생의 장남 안티파테르도 처형했다. 헤롯은 자신의 왕궁에서 날마다 얼굴이 고운 미소년들을 데리고 환락에 빠져 있었으나, 헤롯의 신하들은 평안을 구가하고 있었다. 또 지중해 연안을 모두 장악한 로마는 그 시대를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의 시대라고 자찬했다.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3~14).†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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