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㉚|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유다에서 예레미야가 약관 20세의 나이로 부르심을 받았던 BC 627년, 앗수르에서 임명한 바벨론 총독 칸탈라누가 죽자 바벨론 변방의 지휘관이었던 나보폴라살은 갈대아 출신의 동지들을 모아 이듬해에 내분이 일어난 앗수르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BC 605년 나보폴라살이 죽자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은 재빨리 부친의 왕위를 승계하고 곧장 유다를 공격해 먼저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단 1:1).
이미 90년 전, 병상에서 일어나 기분이 좋아진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온 문병사절단에게 왕실의 영재 양육 제도와 왕궁의 모든 창고에 있는 보물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사야가 깜짝 놀라 왕께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7~18).

예루살렘에 입성한 느부갓네살은 애굽인들이 세운 왕 여호야김에게 봉속을 명했다. 그는 성전의 기명 중 일부만을 가져갔을 뿐, 오히려 왕실의 유능한 소년들을 추려내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그들을 유다의 진정한 보물로 본 것이다.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단 1:4).
또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모두 바벨론 식으로 바꿔버렸다.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의 다니엘은 벨드사살(벨 신이 보호하신다)로, 그의 친구들 중 하나냐는 사드락(태양의 영감)으로, 미사엘은 메삭(포도의 여신에 속함)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느고의 종)로 바꿔주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창씨개명’을 당한 것이었다.
“왕이 그들과 말하며 보매”(단 1:19).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 중 특히 네 소년의 지혜가 출중함을 보고 측근에 두어 왕의 일을 돕게 했다. 적국에 잡혀온 유다 왕족 소년들의 심경은 비록 참담했더라도 그들은 바벨론 왕의 측근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다니엘 안목’의 ‘세계화(Globalization)’는 BC 603년에 꾼 바벨론 왕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깊고 은밀한 일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단 2:1).
왕이 전국의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들을 불러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그 꿈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라 하였으나 아무도 말하지 못하자 그들을 다 죽이라고 명했다. 다니엘이 그것을 전해 듣고 하나님께 그 내용을 물었다. 그의 자리가 적국에 있었기에 다니엘은 감히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지 못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다.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 2:19).
시간과 공간을 보는 다니엘의 안목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1~22).
그는 즉시 바벨론 왕 앞에 나아가 그가 알아낸 것을 말한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단 2:28).
그는 왕이 꿈에서 본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단 2:31).
느부갓네살 왕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신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쇠와 진흙이 섞여 있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4~35).
다니엘은 그 의미까지도 모두 해석했다.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단 2:38~40).
그 네 나라의 이름이 비록 거명되지는 않았으나 후일 다니엘에게 계속해서 계시된 내용과 역사의 전개에 따르면 순금의 머리인 바벨론에 이어 메대와 바사 그리고 헬라의 시대를 거쳐 로마의 시대로 이어져 감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했고 또 학문의 수장으로 삼았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아멜말둑에 이어 바벨론 왕이 된 벨사살은 BC 539년 천명의 귀족들과 연회를 베풀고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금잔으로 술을 마시다가 한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의 벽에 글씨 쓰는 것을 보고 놀라 다니엘을 불러 해석을 부탁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달아보니 왕의 무게가 부족해 그 나라를 끝내고 두 나라에 나눠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에 바사 왕 고레스와 그의 처가인 메대의 연합군이 바벨론에 들어와 벨사살 왕을 죽였다. 고레스는 바벨론의 통치를 장인 다리오에게 맡겼고, 다리오는 다니엘을 세 명의 총리 중 하나로 세웠다. 이후로도 하나님은 계속해 다니엘에게 세계가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해 일러 주셨다.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다니엘은 또 BC 536년 힛데겔 강변에서 큰 전쟁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을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 10:5~6).
그 모습은 후일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만났던 분과 같았다(계 1:13~15). 그분이 먼 훗날의 일까지를 모두 다니엘에게 설명해 주셨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내 양을 찾으리라
바벨론을 배반하고 다시 애굽과 동맹한 여호야김이 죽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BC 597년 다시 제2차 침공을 강행했다. 그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을 폐위시키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으며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다 가져갔다.
“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16).
끌려간 자들 중에는 레위 가문의 에스겔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스겔은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바벨론의 그발 강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초닷새라”(겔 1:1~2).
여호야긴 왕이 끌려간 지 5년이면 BC 592년이고 그 해에 에스겔의 나이가 30세였다면 BC 597년에는 25세, 그리고 다니엘이 끌려간 BC 605년에는 17세였으니 그와 다니엘은 거의 같은 또래였다고 볼 수 있다. 유다 왕실의 후예인 다니엘과 레위 집안의 에스겔은 같은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자라나 8년의 시차를 두고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렘 22:10).
다니엘은 바벨론 왕에게 발탁되어 왕궁에 있었고, 에스겔은 그발 강변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왕궁에서 고위직에 오른 다니엘이 왕궁 밖에 잡혀 와 있는 동포들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매우 특이하다. 포로들 중에는 그런 다니엘의 태도를 변절자라고 비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를 의인으로 평가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바벨론에 끌려간 두 선지자의 글에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그 대신 갑자기 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가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넣었을 때였다.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단 3:24).
그러나 왕이 보니 불 가운데 네 사람이 보였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
신학에서는 이 ‘넷째’ 인물을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그리고 다니엘서에는 다시 ‘사람의 아들(人子, Son of man)’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바벨론에 끌려온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그 후로 하나님은 늘 에스겔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인자야’라고 부르기를 계속하신다. 왜 하나님은 갑자기 그를 ‘인자’라고 부르셨던 것일까? 하나님이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불러 애굽으로 들여보내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아들’로 삼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겨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신 29:28).
그러므로 저주를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부르셨고, BC 586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했으나 그에게 놀라운 소망을 전해 주셨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독생자가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公平, equal)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겔 18:25).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의 오해’였던 것이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겔 15:2).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포도원을 가꾸신 것은 그 사랑의 열매를 위함이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었다. 사람의 흔한 오해는 자신이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라 큰 목재로 사용되리라 여기는 것이다.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겔 15:3~4).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아들이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겔은 그 진정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구하러 오시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2).
그리고 새롭게 세워지는 하나님의 도성을 본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
‘여호와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이었다.†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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