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그루버 칼럼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 초자연적인 용서의 능력

나는 그날, 주교도소에서 살인혐의로 기소된 수감자들과 하루 종일 상담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도소에 가는데도, 또한 오는데도 몇 시간이나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전에 어떤 남자가 내 이웃에게 밧줄을 빌려준 일이 있었다. 그 남자가 밧줄을 찾으러 오겠다고 했는데 마침 내 이웃이 외출 할 예정이었다.
나는 밧줄 주인에게 밧줄을 내 이웃 대신 우리 집 앞 계단에 놓아둘 테니, 편할 때 와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내가 막 집에 도착해서 집 앞에 주차를 하려는데, 아들 녀석들이 달려와서 소리쳤다.
“아빠, 아빠, 그들이 밧줄을 훔쳐가려고 해요!”
아이들은 그렇게 외치고 건물을 돌아 뛰어갔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 뛰어갔다. 아이들이 모두 나무 아래에 모여 있었고, 밧줄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집 앞 계단에 놓아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나무에 매달아 타고 놀았던 것이다. 그곳에 가보니 한 소 년이 나무 위에 올라가 칼로 밧줄을 자르려고 했다. 나는 그 소년에게 소리쳤다.
“밧줄 그대로 둬!” 내가 고개를 들고 나무 위를 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내 앞에 오더니 내 턱에 칼을 들이대고는 나무 위에 있는 소년에게 명령했다.
“에릭, 잘라버려!” 말을 하려면 턱을 떨구지 않고 입을 벌려야 했다(턱을 떨구면 칼에 찔릴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들었다(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상황을 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 밧줄은 내 것이 아니야. 그러니 네가 가져가면 안 돼.”
그러나 사실 내 마음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랬다.
“밧줄을 가져가. 내 가족을 건드리지 말고 빨리 갖고 가 버려!”
내 목에 칼을 댄 소년이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가 언제 달라고 했어? 그냥 가져가겠다는 거지!”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는 마약에 취해 있었다. 그가 말했다.
“한 마디도 하지 마. 안 그러면 목을 따버릴 테야.”
나는 속으로 애타게 주님께 호소했다.
‘아버지, 이 사람은 내 목에 칼을 찌를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제가 아버지를 위해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죠? 아버지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아이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어떤 말을 해야 그 남자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를 아셨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나 아버지께 응답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 자신도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못 알아듣는구나. 그 밧줄은 내 것이 아니야. 가져가서는 안 돼.”
물론 내 속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서 밧줄 갖고 가버려.’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
그러나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그에게 밧줄을 가져갈 수 없다고 말 하라고 하셨다. 그러자 소년은 더 분노하면서 다시 협박했다.
“입 닥치지 않으면 목을 따버리겠다니까! 내가 언제 밧줄 달라고 했냐고! 그냥 가져가 겠다고 했지. 에릭, 어서 잘라버리란 말이야!”
나는 다시 내 자신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밧줄 자르면 안 돼. 빌려온 거란 말이다. 가져가면 안 돼.”
그러자 칼을 든 소년이 떨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무 위의 소년을 보고 말했다.
“에이, 에릭! 내려와. 그 밧줄은 쓸모도 별로 없어.”
그리곤 뜻밖에도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 보고 물었다.
“아저씬 두렵지 않아요?”
“많이 두려웠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그게 두려운 사람이 하는 행동이에요? 내가 마약에 취하긴 했어도, 사람이 벌벌 떨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요. 아저씨는 떨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내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예수의 것이거든.”
“아저씨, 내가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말고 나중에 다시 와서 아저씨하고 말 좀 해도 될까요?”
“그래, 언제든지 환영할게.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지 와.”
그리고 덧붙였다. “밤이든 낮이든 너를 위해 문을 열어줄 테니까.”

그 소년은 예전에 내 아이의 머리를 치려고 망치를 들고 우리 집으로 쫓아 들어온 적이 있었다. 지하실 유리창을 차서 깨뜨리기도 했고, 내 어머니와 아내에게 저주를 퍼부은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우리 아이를 잡겠다며 대문의 창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는 문 앞에서 조용히 서서 우리에게 사정했다.
“5분만 들어가게 문 좀 열어주세요. 그 녀석 머리를 깨부수게.”
그는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이 내게는 이런 사건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나는 그 소년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내 아이라도 그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의 눈이 한쪽만 보기 때문이다. ‘밧줄 사건’이 있기 전에는 그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전체를 보고 계신다. 아버지는 그 소년의 아버지가 아주 어릴 때 그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나는 그 소년 안에서 내 아이들을 괴롭히고 내 어머니와 아내를 위협하는 아주 위험하고 귀찮은 존재를 봤지만, 하늘 아버지는 소년의 엄마의 남자친구가 소년과 누이동생을 학대하는 것을 보셨다.
내 앞에 있던 소년은 세상에 잔뜩 화가 나 있었고, 특히 남자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에게서 칼과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집에서 이사하기 전에 그 아이는 주님께 마음을 드렸다. 이삿짐 트럭에 짐을 잔뜩 싣고 차를 몰고 떠나려던 나는 백미러를 통해, 길가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턱을 고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트럭에 앉아 있는 우리 아이 들에게 “곧 돌아올게”라고 말하고 차 밖으로 나가서 아이 곁에 앉았다. 나도 그 아이처럼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었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이해가 안 돼요. 이제 머리도 단정히 하고, 마약도 안 먹고, 욕도 저주도 안 해요.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교회도 다녀요. 여동생도 예수님께 마음을 드렸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내게서 목사님을 뺏어가시는 거죠. 왜요?”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세상 어딘가에 그 아이처럼 예수님 이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며, 이제 그는 예수 안에서 내 가족이 되었다는 것과 서로 연락하며 지낼 거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 사건을 개인적으로 받아 들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 집에 찾아와 집을 부수고 내 아내와 어머니를 해코지 하려고 할 때 경찰을 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헨리 그루버  (목사)

‘세상을 걷는 중보기도자’로 알려 져 있는 필자는 18세 때부터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의 우범지역에서 주님과 함께 걷기 시작해 지금까지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 그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그가 만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 을 전하고 있다. 그의 삶에는 초자 연적인 이적들이 많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걸으며 기도한다는 사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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