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⑰|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영원 전부터 고독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와 사랑하며 ‘함께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과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 그에게 극히 위험한 ‘자유’를 주신 것을 알게 되자 사 탄이 이를 시기하여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그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탄의 ‘갈라놓기’ 작전이 시작된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사탄의 작전은 이렇게 간교했다. 하나님과 사랑하려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도 그것을 바라셨다. 그러나 사탄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호기심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 것 이다.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b).
사탄은 마치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그분이 싫어하신다는 투로 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반발하게 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도록 유인한 것이다. 벌써 그것에서부터 사탄의 ‘갈라놓기’ 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여자와 그 남편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다는 것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본래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주신 것은 그분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그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배우라는 뜻이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즉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깨닫는 ‘징조’요 그들이 가꾸는 ‘가정’은 그 사랑의 교과서요, 천국의 ‘예표’였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에 성공한 사탄은 다시 그 사랑의 교실이며 천국의 모형인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아담의 변명 속에 그 전략이 숨어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아담은 자신이 잘못한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함으로 이미 그와 아내 사이에 간격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아담이 지목한 여자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자 여자는 또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

하나님이 지으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모든 새와 땅에서 사는 모든 생물은 모두 사람을 위해 창조된 것이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다스리라는 말은 곧 위임한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잘 가꾸고 보살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책임을 뱀에게 전가하여 사람을 위해 창조된 생물들과의 관계 속에 적개심을 만들어 넣었던 것이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뱀이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뱀뿐만이 아니고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도 함께 저주를 받았고 그 중의 뱀이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였다. 이 때로부터 사람은 그가 가꾸고 보살펴야 할 모든 동물들과 대립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그렇게 해서 ‘함께 살고 싶어’하셨던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가 갈라졌고, 남편과 아내의 마음도 갈라졌고, 사람과 동물의 관계도 갈라진 것이다, 이렇게 ‘대성공’을 거둔 사탄은 그 ‘갈라놓기’ 전략을 신속하게 확대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가인의 족속과 셋의 족속이 갈라졌고, 홍수 후에는 셈과 야벳이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갈라졌고, 바벨탑 사건 이후로 함의 자손 니므롯과 셈 자손이 갈라졌다.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9).

서로 다투며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고통 속에서 탄식과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그 고통을 호소한 대표적 인물이 ‘욥’이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
그는 도대체 왜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게 하시느냐고 묻는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 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
그리고 마침내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지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도대체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 돼야 하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그의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며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의연하던 욥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사람의 시간(크로노 스)’으로 환산해 달라고 하늘을 향해 떼를 쓴 것이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친구 빌닷의 비난만 돌아온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 는가”(욥 8:2).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할 능력이 없는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은 끝이 없다. 결국 빌닷은 알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말자고 제안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욥 18:2).
욥도 역시 친구들의 시간을 비난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욥 19:2).

욥의 질문에 답이 없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부과되는 고통은 끝이 없었다. 아브라함 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러했고 모세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욥처럼 모세도 자주 나를 죽여 달라고 호소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마음은 서로 갈라졌고, 지도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비난하는 자가 나타났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삿 6:10).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BC 1406년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로 갈갈이 찢겨진 그들의 마음을 사무엘 선지자의 헌신으로 겨우 추슬러 사울의 통일 왕국이 선 것은 365년이 지난 BC 1050년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이냐고 아무리 질문해도 하나님의 답변은 늘 그분의 카이로스에 머물러 있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창 3:19).
아담이 에덴을 떠난 60세에 그 말씀을 들었다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인간의 시간은 ‘930-60=870년’이나, ‘네가’를 ‘우리 모두’로 본다면 제각기 다른 여러 숫자들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곧 개인적 종말론이다. 모든 사람은 ‘현재’로부터 그가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 날’ 또는 ‘그 때’를 궁금해 하며 살고 있다. 인간의 수명에 관한 것 외에 하나님의 답변은 늘 ‘하나님의 때’를 가리킨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창 8:22).
그것은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때’이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도록 대답해 주어도 어차피 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야곱이 언급한 ‘실로’의 임하심도 그러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창 49:10).
그 시간도 당대에는 ‘하나님의 때’여서 인간의 시간으로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오늘날 알게 된 그리스도의 탄생은 BC 4년이니 야곱이 그것을 발설한 BC 1859년에 1855년 후에 있을 사건을 예고한 셈이다. 그러나 ‘오시기까지’가 그리스도의 초림이 아니라 재림하여 인류사를 마무리하는 ‘심판의 그 날’을 가리킨다면 여전히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때가 되는 것이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땅이 있을 동안’에 사람을 죽이려는 사탄이 ‘갈라놓기’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도 어려서부터 주변의 모든 관계들로부터 그를 끊어내고 단절시키려는 사탄의 계략에 걸려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시 27:10).
부모와의 간격은 물론 형들도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나는 네 교만과 네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
그는 사울 왕에게도 미움을 받아서 쫓겨 다녔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삼상 23:26).
들에서 양을 칠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자와 곰을 상대로 싸웠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도 고난이 계속되자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그도 역시 ‘하나님의 때’를 헤아릴 수 없어 몸부림을 쳤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2).

그는 눈을 밝혀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보는 눈’이 감겨 져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3~4).

BC 1040년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20세 때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렸으나 사울 왕을 피해 10년간 도망자가 되었다.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지도자가 되고, 37세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다.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 5:4~5).
그러나 왕이 되었다고 해서 그의 고난이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50세 되던 해에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으나 그 위로 세 아들을 더 낳았으므로 그가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것은 40대 중반이었다.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6:2~3).

그분의 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그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가를 안다. 다윗은 그야말로 뼈와 영혼이 떨리는 두려움을 겪는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시 6:6~7).
그리고 마침내 그가 61세 되던 해에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났다. 아들과 칼로 맞설 수가 없어 일단 마하나임으로 피신했으나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떠났을 것 같아서 더 두려웠다.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그는 방백과 백성들에게 호소한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시 4:2).
그의 만년은 거의 엉망이었다. 성전 건축을 위해 힘써 건설 자재를 모아들였으나 세입이 부족해 67세에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사흘에 7만 명이 죽는 대 참사가 발생했다. 심복이었던 군대장관 요압도 그와 멀어졌고, 눈을 감기 직전에는 아들 아도니야가 요압의 지지를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간신히 막내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세워 놓고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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