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⑯|친히 징조로 주실 것이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실 때부터 이미 그분이 바랐던 사랑의 밀월이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계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의 안색을 살펴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복선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이 곧 ‘징조’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 1:14).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와 달라서 감히 헤아릴 수 없으나 그분은 사람이 살아가게 될 공간 속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그것들의 ‘운행 주기’를 통 해 때와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와 맞추게 하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기한과 때가 있다고 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전 3:1).
그리고 이미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사고를 쳤을 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크로노스)’에 맞춘 징조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렇게 해서 아담과 그 아내의 수명은 한정되었다. ‘때’가 정해진 것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3~5).

하나님은 아담의 수명을 인간의 시간에 맞춘 시간의 930세로 제한하셨다. 즉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신 것은 그의 종말을 ‘징조’로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아담의 수명은 930세로 설정되었고, 그 징조는 성취되었다. 우리는 아담의 일생을 추적하며 당시의 긴박했던 ‘징조’들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얼마나 살았을까?”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일단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만 등장하고 그 자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나온 후에 가인을 낳았을 것이다. 아담이 몇 살에 가인을 낳았는지 알 수 있다면 그들이 에덴에서 얼마나 살았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담이 가인을 몇 살에 낳았는지는 성경에 없다. 그것을 추정해 볼 수 있을까?

범사에 때가 있고
창세기 제5장에는 셋으로부터 노아까지 셋의 자손들이 첫 아이를 낳은 나이가 밝혀져 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마할 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다.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첫 아이를 낳은 때는 65세가 가장 빠르고 4명이 백세를 넘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아벨이 죽은 후에 셋을 낳았다면 가인과 아벨이 태어난 것은 일단 아담의 나이가 65세에서 130세 사이였을 것이고,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던 당시의 나이가 그들이 아내를 맞아 가정을 이룬 60세 정도였다고 가정한다면 아담이 가인을 낳은 나이는 65세, 아벨을 낳은 것은 70세쯤으로 역산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나온 연대는 언제인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산 기간은 약 60년 정도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아담이 창조된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그 계산법이나 주장이 다르나, 대체로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 ‘BC 4114년’이다. 그 연대를 기준으로 추정하면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에덴을 떠난 것은 ‘BC 4054년’쯤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기준으로 그 이후의 연대를 추정해 보는 것도 흥미 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셋이 태어난 것은 BC 3984년이고 에녹은 BC 3492년 그리고 노아가 태어난 것은 BC 3058년이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대홍수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BC 2458년이 된다. 하나님은 그 120년 전, 즉 BC 2578년에 그 징조를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되었으나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작정했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BC 2578년에 노아에게 주신 ‘징조’였다. 그리고 노아는 그 징조를 안지 20년 후인 BC 2558년에 셈을 낳았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 5:32).
셈과 함과 야벳이 BC 2558년을 기점으로 해서 근소한 차이를 두고 태어났으므로 세 형제의 출생을 한꺼번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성장기에 가인의 지역에 들어가 건축기술과 기계기술 그리고 항해기술을 습득하여 부친 노아와 방주를 건조하는 일에 백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 일에 택함을 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에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1~22).

어차피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미 판결하신 바와 같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아무도 그 선고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고, 홍수에서 겨우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앞으로 하나님께서 부과하는 훈련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구원을 받게 될 자와 탈락하여 멸망으로 가게 될 자를 함께 두었다가 구분하겠다는 것을 미리 징조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그리고 그 징조의 증거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4~15).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노아의 입을 통해서 그분이 장치하신 ‘비밀의 징조’를 미리 일러 주셨던 것이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9:26~27).

‘데자뷔(deja vu, 이미 보았다)’라는 현상이 있다. 처음 접하는 장소나 환경이 어쩐지 눈에 익고, 언젠가 같은 현상을 겪어본 듯한 느낌 즉 기시감(旣視感)을 말한다. 이런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하게 제시된 이론이나 설명이 없다. 그 현상의 신비성 때문에 토니 스콧 감독이 2006년에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전 1:9).
솔로몬이 간파한대로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무심결에 흘려버렸던 중요한 징조나 사건들의 기억이 유전자 속에 깊이 남아 있다가 갑자기 돌출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중에도 ‘대홍수’ 같은 무서운 기억은 아직도 큰 위력으로 남아 있다. 잠들었던 어린 아이가 갑자기 울다가 깨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큰 물에 떠내려가는 꿈을 꾸는 것이다. 높은데서 떨어지는 꿈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기도 한다.


임마누엘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옮겨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던 아브람을 다시 이끌어내어 방랑자가 되게 하신 것도 그런 ‘징조’ 중의 일부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개역한글).
그것은 곧 이 세상 어디에도 사람이 안주할 터가 더 이상 없다는 ‘징조’를 보여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 곳을 정해 주지 않고 우선 ‘떠나라’고 하셨으나 그가 결국 도착한 곳은 ‘가나안’ 땅이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그러나 그곳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창 12:6).
가나안 사람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만든 자들이었다. 그들은 땅의 여신 아세라를 만들어 하나님 즉 엘 신과 결혼시키고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바알로 하여금 그 어미 아세라와 결혼하게 만든 패역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을 그런 사람들의 땅으로 이끌고 가셨던 것일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정착해 살 만한 땅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징조’였다.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에게 주겠노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그러나 그 땅도 그리 살만한 땅은 아니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후일 아브라함의 손자 곱의 가솔 70명이 식량 문제로 애굽에 내려간 사건의 징조가 되었고, 그의 아내 사래를 애굽 왕 바로에게 뻬앗길 뻔 했다가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려 빠져나오게 된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역시 하나님께서 애굽에 큰 재앙을 내려 빠져나온 사건의 ‘징조’가 되었던 것이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창 13:2).
패역한 자들의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부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그 분은 다시 그에게 시련을 주신다. 소유가 너무 풍부하여 조카 롯과 갈라서게 하신 것 이다. 계산에 빠른 롯은 풍요하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 지역으로 옮겨 갔고 아브람은 그와 반대쪽을 택하다 보니 험준한 헤브론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조카 롯에게 좋은 지역을 양보한 그를 다시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개역한글).
이 장면 역시 장차 그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이 큰 왕국을 세울 것에 대한 ‘징조’였다. 또 그것은 다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역사의 대반전을 이루시고, 그의 제자들이 동서남북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모두가 ‘믿음의 자손’이 될 것을 보이신 ‘징조’였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게 한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 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아브람이 롯과 갈라선 후에 북방 4개국이 남쪽의 5개국을 공격해 왔다. 이는 물론 장차 계속될 세계대전을 ‘징조’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런 큰 전쟁 중에서도 아브람은 사병 318명과 함께 북방 연합군을 기습하여 조카 롯의 가족을 구출해냈다. 이는 후일 기드온이 300명의 정예군으로 미디안 군대 13만 5천명을 진멸한 놀라운 기적의 징조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적은 계속될 것이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20).
함의 자손 니므롯과 그 추종자들이 바벨탑을 건설할 때 하나님이 내려오셨듯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 때에도 그분이 내려오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 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창 18:20~2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심판의 ‘징조’가 되었고, 모리아 제단의 사건에서는 이삭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쓰셨거니와 계속 우물을 파는 그의 삶도 후일의 ‘징조’가 되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모든 ‘예표’가 그리스도를 향해 선택되었던 것과 같이 모든 ‘징조’도 당시의 환경과 정황 속에서 솟아나와 그리스도의 구원을 향해 흘러내리고 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었다.†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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