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와 함께 있으리라⑩|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서 그 마음에 합당한 자를 택하여 장차 오실 자의 예표로 세우시고 그와 동행하셨다. 아버지의 결정에 순종한 이삭은 장차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실 독생자의 예표가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의 예표로, 다윗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왕의 예표로, 그리고 성전 재건 시대의 여호수아는 자신을 드려 속죄를 이루는 대제사장의 예표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히 13:7).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그에게 맡겨진 사명과 소임을 감당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오직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에서 일어나 그분의 말씀을 전하며 싸웠던 그분의 충성된 군사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의 분단 시대를 질풍처럼 살았던 ‘엘리야’였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아담의 아들 셋의 때부터 ‘여호와’라고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은 후일 그분이 모세를 만날 때 공식적으로 인정하셨다. 랍비들이 그 이름을 묵음으로 읽어 정확한 발음이 실전되었으나 ‘여호와’와 ‘야훼’가 유력한 전승으로 남았고, 사람의 이름을 그 이름과 연결시켜 작명할 때 그것을 위에 붙이면 ‘여호∼’가 되고 끝에 붙이면 ‘∼야’ 가 되었다. 따라서 이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가 된다.

하늘의 기병대


그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그의 본거지가 길르앗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디셉은 갈릴리 북단에 있는 납달리 지경에 있었다. 엘리야는 그의 강인하고 분명한 성품, 털옷에 가죽 띠를 띤 복색으로 보아 변경의 군관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갈멜산에서 이스르엘 지경까지 달려갈 정도로 강골이었고,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 850명을 한 번에 죽여 버릴 만큼 단호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왕하 2:12).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스승을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아 그가 전차대 혹은 기병대 출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군대를 떠나 선지자의 길에 들어섰던 것일까? 필자의 소설 <불타는 땅>에서는 북 왕국의 오므리가 무력을 동원해 모반할 때 엘리야가 군대를 떠난 것으로 썼다. 이미 모반은 바아사의 전례가 있고 시므리 왕도 모반으로 즉위했으나 오므리를 따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왕상 16:30~31).
엘리야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의 시대에 한발을 예고한지 제3년에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을 갈멜산에 모아 놓고 그들의 신과 대결할 것을 선포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기도할 때 그의 제단에 불을 내렸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
모세가 해방 세대의 선지자였다면 엘리야는 분단 시대의 선지자였다. 모세는 애굽 군대의 사령관 출신이었고, 엘리야는 변경 수비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관 출신답게 여리고에 선지자 사관학교를 운영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실 때에도 그를 기병대의 지휘관으로 예우했다. 불전차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그를 호위했던 것이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 아람 왕이 그의 제자 엘리사를 잡으려 했다.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왕하 6:14).
아람 왕이 보낸 많은 마병과 병거들이 포위한 것을 보고 엘리사의 사환이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모르자 엘리사가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기병대’라면 우리가 또 성경에서 주목해야 할 거룩한 무리가 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렘 35:1~2, 개역한글).
그러나 레갑 족속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요구를 거부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렘 35:6~7, 개역한글).
요나답(여호나답)은 엘리야와 같은 시대에 레갑 족속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그러나 레갑 족속의 기원은 요나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결속시킨 처음 지도자는 광야 시대의 ‘훌’이라는 사람이었다.
“갈렙(헤스론의 아들 글루배)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에게 훌을 낳아 주었고 훌은 우리를 낳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대상 2:19~20).
훌은 셈 가문을 통해 전수된 건축 기술과 미디안의 겐 족속에게 전해진 금속 기술을 보유한 유다 지파의 기술자였다. 그의 손자 브살렐은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그 일을 주도했다(출 31:2). 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유다 지파와 겐 족속의 기술자들이 베들레헴 근처에 모여 살게 하고 모친의 이름을 따라 그곳을 ‘에브라다’라고 했다.
“갈렙(글루배)의 자손 곧 에브라다의 맏아들 훌의 아들은 이러하니”(대상 2:50).
훌이 지도하는 기럇여아림 족속과 살마 족속, 하렙 족속 등 많은 기술자의 집안이 모두 에브라다에 모여 ‘훌의 아들’ 즉 그의 제자를 자처하며 기술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대상 2:55).
금속 기술을 지니고 있던 미디안의 겐 족속이 모두 훌을 중심으로 에브라다에 모여 살았고 훌 집안의 건축 기술과 겐 족속의 금속 기술은 광야 생활에서 필요한 장막과 모든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에브라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할 때 이들의 자부심을 송두리째 꺾어 놓는 일들이 벌어졌다.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왕상 7:13).
즉 가나안의 두로 사람이 들어와 성전 공사의 총감독이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두로 사람들이 모든 성전 공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전에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오만 삼천 육백 명이라 그 중에서 칠만 명은 짐꾼이 되게 하였고 팔만 명은 산에서 벌목하게 하였고 삼천 육백 명은 감독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게 하였더라”(대하 2:17~18).

전차의 두 바퀴


성전 공사에서 소외된 ‘에브라다’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가 어땠을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들을 ‘레갑 족속’으로 부른 것은 ‘요나답’의 때부터였다. 성전 공사에서 소외되어 분노한 그들이 요나답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을 ‘레갑 족속’이라고 했을까? ‘레갑’이란 ‘말을 탄 사람’ 또는 ‘기병’이란 뜻이다. 혹시 기병대 출신의 ‘엘리야’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요나답은 실망한 에브라다의 기술자들을 규합하면서 가나안 사람들의 손으로 건축한 성전을 인정할 수 없으니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성전을 건축하자고 다짐했을 것이다. 필자의 소설 <불타는 땅>에서는 그 요나답이 ‘엘리야’를 찾아가 전략적 지침을 받았을 것으로 설정했다.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요나답은 아합 왕실의 타도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예후와 손을 잡고 바알 신전의 파괴에 가담한다.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요나답)을 만난지라”(왕하 10:15).
요나답과 레갑 족속의 목표는 분단된 남북을 다시 통일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새 성전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을 파괴한 예후는 왕이 된 후에 통일을 포기했다. 이에 실망한 요나답은 다시 레갑 족속과 방랑에 나선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도주 마시기를 거부한 레갑 사람들을 칭찬했다.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렘 35:18).
그리고 그들에게 매우 놀랍고 큰 약속을 주셨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

그리고 남왕국의 선지자 미가의 글에는 ‘에브라다’가 언급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개역한글).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의 독생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만 주목했지 ‘에브라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베들레헴과 에브라다가 서로 인접해 있으므로 둘을 합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본적지인 ‘믿음의 성읍’이고 에브라다는 성전을 자기네 손으로 짓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 모여 산 ‘충성의 마을’이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나섰을 때 잇도의 손자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재건을 추진한 기술자는 스룹바벨이었고 당시의 대제사장은 여호수아였다. 하나님은 재건을 추진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초조해하고 있는 그들을 위로하셨다.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예루살렘을 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먼 미래의 일까지 포함된 다중적 예언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슥 3:8).
말씀하신 그 ‘싹’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스가랴의 글에서도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그 ‘여호와의 전’은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세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표의 사람들’을 말씀하시며 ‘두 나무’를 언급하신다.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슥 3:10).

후일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언약’(요 1:48)을 의미했고,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교회’(요 15:5)를 의미하게 되었다. 스가랴는 다시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보게 된다.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는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슥 4:2~3).
이 등잔도 역시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건축자 스룹바벨을 의미한다면 이들은 ‘믿음’과 ‘충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리라”(슥 4:6).

이런 장면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도 보았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린 두 사람 중 아론은 장차 대제사장이 되어 ‘믿음’을 대표할 자였고, 훌은 이스라엘 기술자들의 ‘충성’을 이끌 인물이었다. 모세가 기도하던 산꼭대기에도 돌이 있었고, 스룹바벨의 성전에도 돌이 있었다.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아론과 훌이 함께 힘쓰고,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등잔에 함께 기름을 붓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고, 믿음과 충성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이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엘리야를 호위했던 불 수레에는 두 개의 바퀴가 달려 있다. 그 하나는 언약에 대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그분을 따라가는 ‘충성’이다.†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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