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③|내 얼굴을 숨길 것인즉

내 얼굴을 숨길 것인즉


 외로우신 하나님은 모처럼 사랑을 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말씀을 떠난 사람의 선택 때문에 아픔을 겪으셨다. 하나님은 크게 낙담하고 탄식하셨으나 그대로 사랑을 포기하실 수 없었다. 에덴을 떠나 세상에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 사람들이 그분에게 제물을 드려 호소하며 도움을 구하여 ‘공정거래’가 가능할 수 있도록 ‘제사’라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 주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창 4:3).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가인이 들에서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보다 앞세우려고 했던 가인의 불의가 그 원인이었다. 그런 일은 가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 자손들에게도 유전되었다. 더 큰 문제는 불의한 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등에 업고 그 권위를 내세워 폭행과 압제를 자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가득하므로 하나님이 땅의 모든 것을 홍수로 쓸어버렸으나 홍수 이후에도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 큰 성들을 건설한 셈의 자손들은 아우의 집안들을 하나님의 권위로 위협하며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함의 가문 출신의 니므롯은 셈의 성들을 점령하고 그들이 휘두르던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았다.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9).

그분은 어디에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억압과 폭정의 법으로 삼아 악행을 일삼자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하실 수 없었다. 게다가 인간이 에덴을 떠난 이후로 유일한 소통의 통로가 되었던 ‘제사’ 의식마저 수탈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사람과의 대화가 막혀 버려 하나님이 그 악행들과 무관하심을 설명하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3).
 홍수 이전에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작정하셨는데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자 손들 가운데 또 같은 악행이 이어지자 하나님은 숨어버리기로 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신 31:17).
 하나님이 숨으시자 사람들은 아예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것조차 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재앙과 환난을 당해 그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들은 허둥대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가끔 제 생각대로 만들어낸 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 31:18).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숨기셨던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어진 위험한 은혜 즉 ‘자유의지’를 함부로 사용하여 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 잘못에 상응하는 엄한 징벌적 조치를 내리시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셔서 홍수 때에 노아의 가족들을 살려 둔 사례처럼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아주 좁고도 험한 비밀의 통로를 장치하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을 한 번쯤 손에 잡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성경의 맨 앞부분 <창세기>의 이 첫 구절은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전제’이다. 그러나 이 단호한 문장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문장의 주어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두 다르게 표현된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고,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으로 쓰지만 중국에서는 ‘샹띠(上帝)’ 일본에서는 ‘가미사마(神樣)’로 표시된다. 헬라어로는 ‘데오스’, 라틴어는 ‘데우스’가 되고 영어로는 ‘God’이다. 이렇게 나라마다 호칭이 달라진 이유를 설명하려면 바벨탑 이후 흩어진 민족들의 이동 경로를 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어찌 되어 있을까? 히브리어로 ‘여호와(스스로 계신 자)’ 또는 ‘아도나이(주님)’ 등이 있으나 원초적 호칭은 ‘엘’이다. 근동 지역 신화들을 시대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먼저 사용된 가나안 지역의 ‘엘’(테오도르 가스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과 만나게 된다. 그 호칭은 히브리어에도 승계되었다. 그런데 창세기 서두의 ‘하나님’은 ‘엘’의 복수형 ‘엘로힘’이다.
  “감히 하나님을 복수형(複數形)으로 쓰다니……?”
 보통 사람이 그리 했다면 큰일 날 사건이 성경의 첫 문장에 등장한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믿음은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에도 건드릴 수 없는 진리이다. 성경의 첫 문장인 이 대목에 놀라운 수수께끼를 장치해 놓은 창세기는 우리가 몰랐던 큰 비밀을 숨겨 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그냥 덮어 두고는 그 다음 대목으로 옮겨가기조차 어렵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태초’의 일을 기록한 창세기는 언제쯤 누가 기록한 것일까? 유대교에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다섯 두루마리를 ‘토라’라고 하는데 이를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 쪽의 성경학자들도 이를 ‘모세5경’이라 부르며 역사서, 선지서 그리고 복음서의 여러 증언들을 근거로 유대교의 전통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스라엘 조상들로부터 구전되어 온 창세기는 애굽을 탈출한 BC 1446년 직후 모세가 그 내용을 정리해서 문자로 기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쓰신 ‘십계명’과 ‘성막의 설계’를 받는데 까지를 시내산에서, 그리고 성막을 완성하여 광야의 행군을 시작하는 부분은 레위기, 민수기 등과 함께 광야 시대에 작성되고, 모세의 유언이 된 신명기는 모압 광야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하나님께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셨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 12:6~7).
 그러므로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도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물어 확인하고, 그분의 답변을 정확하게 받아썼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8).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분명하게 들었다는 모세가 창세기의 첫 문장에 기록한 ‘하나님’의 호칭을 복수형으로 썼다면 그것도 역시 자기 생각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듭 확인해 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처음 세 문장이 바로 ‘삼위일체’를 계시한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 쪽의 신학적 견해이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셨으며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아들 ‘성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요 1:14). ‘천지창조’의 장면 외에 신약에도 세 위격의 하나님이 함께 출동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삼위일체의 비밀은 자연신학적 진리가 아니라 계시적 진리라고 한다. 이성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일성을 보여주나, 그 신비는 오직 계시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도 처음부터 이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라 많은 논쟁과 갈등이 있었고, 지금도 유일성을 강조하다 ‘단성론’에 빠지며, 삼위의 독립성을 역설하다가 ‘삼신론’이 되거나, 역할 분담으로 설명하다가 ‘양태론’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스스로 숨으시려고 모세로 하여금 그분을 복수형의 ‘엘로힘’으로 쓰게 하셨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3천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신약으로 건너오는 다리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스크바 동북방의 페름 박물관에는 머리가 셋인 새의 형상이 남아 있고, 고구려 사람들은 발이 셋 달린 까마귀(三足烏)를 나라의 상징으로 삼았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이미 금단의 열매를 먹고 자기 식대로 살겠다는 쪽을 선택한 사람은 사망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버린 것처럼 사람을 버릴 수 없어서 홍수 때에 노아의 가족을 살려 두신 것처럼 구원의 끈을 잡을 수 있는 ‘좁고 협착한 길’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모세에게 기록하게 한 창세기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한 번 더 기록하게 하셨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3).
 여기서 ‘나의 영’은 역시 ‘성령’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가 민수기를 쓸 때에도 ‘성령’의 존재를 암시하는 기록을 남기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민 27:1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책임을 지기 위해 성자를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이미 ‘최초의 복음’으로 불리어지는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언급하게 하셨으며, 이를 좀 더 분명히 남겨 두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를 언급하기 시작하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처럼 말씀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와 구분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 이전의 로고스 즉 강림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모세는 그 자신이 만났던 분을 ‘여호와의 사자’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출 3:1~2).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서 세 위격을 설정하셨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부터 이미 ‘우리’라는 복수형 대명사 속에 숨으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새 언약을 세우시자 함의 자손 니므롯은 그 언약을 믿지 말라고 선동했다.
 “그는 하나님이 다시 세상을 물로 멸망시킬지도 모르니까 물이 닿지 못할 높은 탑을 건설해서 하나님께 복수하자고 선동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4)
 하나님은 다시 ‘세 위격’의 ‘우리’로 그 대책을 강구하신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 11:7).
 하나님이 거기서 모든 사람을 온 지면에 흩으셨기 때문에 성과 탑을 건설하던 그들의 공사는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온 지면으로 흩어졌다. 하나님은 숨어 계셨고, 사람들은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상태에서 각기 헤어져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기억은 점점 잊혀져갔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복수형의 ‘엘로힘’ 속에 숨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시 10:11).
 그러나 솔로몬은 지혜의 이름으로 그분의 마음을 전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자신의 실족 때문에 그의 나라를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했다. 북으로 갈라져 나간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쪽의 유다마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선지자 이사야는 숨으신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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