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복이란 무엇인가?

천재의 탄생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복(福)’이란 말을 좋아했다. 한국인의 삶 도처에 복이 함께 한다. 대문에 ‘복’이 있고, 밥상과 밥그릇에 ‘복’자가 있고, 숟가락과 젓가락에도 ‘복’자가 있으며, 이불과 베갯모에도 ‘복’자가 있다. 아이의 두건과 옷깃에도 ‘복’자가 찍혀 있고, 허리에는 ‘복’주머니를 찬다. 태어나서 모든 날들을,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복’과 함께 산다.

“복이란 무엇인가?”
나이 든 어른들께 물어보면 ‘수부귀다남자’를 말한다. 오래 살고, 재물 많고, 권력 있고, 아들 많은 것이 복이라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세상이 험해져서 그런지 독거 노인은 백만이 넘고, 부자집 자식들은 유산 때문에 서로 싸우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면 검찰청에서 사진 찍고, 아들에게 매맞으며 사는 부모를 보면 ‘수부귀다남자’라고 다 복은 아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욥 5:9).
성경에는 하나님이 물 속의 생물과 날개 있는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되어 있다. 태어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는 본능이 그들의 복이었고,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큰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그들에게도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다스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생존과 번식의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24:7).
그들에게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영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국민일보 후원자들의 모임인 ‘국민비전클럽’의 2013년 신년예배 설교에서 조용기 목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놀라운 표현을 사용했다.
“사람은 모두 천재로 태어났습니다.”(2013. 1. 5.)
이어서 다시 반전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바보가 되어 죽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창조되었으니, 그분을 닮은 성품과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천재’로 태어났다는 것이 맞다. 그분의 형상(image)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창조주’라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사람도 역시 ‘창조적 존재’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분의 ‘창조의 동역자’로 태어난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즉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며, 사람도 그분과 함께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도 일이 주어졌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그러고 보니 우리 조상들이 좋아했던 ‘복(福)’이라는 글자도 ‘일’과 관계가 있다. 이 글자에서 ‘나타내다’ ‘드러내다’는 뜻의 시(示)는 창조의 작업을 뜻하는 글자이고 창조주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행할 때 모든 것이 나타나고 드러났다.”(C. H. Kang <창세기의 재발견> 제4장)
그래서 ‘보일 시(示)’에 ‘말씀 신(申)’을 더하면 말씀하시는 하나님 즉 신(神)자가 된다. 요한복음에 ‘말씀은 곧 하나님’(요 1:1)이라고 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복(福)이란 글자는 하나님(示)과 한 사람(一口)이 밭(田)에서 함께 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한 사람이 밭에서 혼자 일하여 집(宀)에 쌓아 놓으면 부(富)자가 되는데 성경은 말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그러므로 ‘복’이란 곧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고, 창조의 동역자 즉 사람에게 주어진 ‘창조적 능력’이었다. 그것이 곧 사람이 받은 ‘보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닮은 ‘창조적 천재’로 태어난 사람이 왜 혼자만 일하여 재물을 집에 쌓는 바보가 되어버렸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죄(罪)’ 때문이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 5:12).
그러면 ‘죄(罪)’란 또 무엇일까? 그것은 ‘넷(四)’을 ‘거부(非)’했다는 뜻이다. 에덴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은 그분이 준 ‘네 가지 복의포기’를 의미하고 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창조적 안목’을 포기했고(창 3:7), ‘창조주와의 동행’도 포기했고(창 3:8), ‘창조적인 인생’을 포기했고(창3:10), ‘창조적 관계’까지도 포기한 것이다(창 3:12).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그렇게 해서 사람은 자신을 지은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태어난 곳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근본을 망각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킬리만자로에서 죽어버린 한 마리의 짐승처럼 된다.
“높이 1만9천710피트인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정상에는 메마르고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누워 있다. 표범이 그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E. Hemingway ‘킬리만자로의 눈’)

두 번째 보물
작가 황순원(1915~2000)의 단편 소설에 <링 반데룽(Ring Wanderung)>이라는 작품이 있다. ‘링 반데룽(環狀彷徨)’이란 등산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산 속에서 길을 잃고 같은 장소를 맴도는 현상을 의미한다.
“짙은 안개나 눈보라를 만났을 때 제일 안전한 방법은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데서 그냥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관계나 식량 사정으로 부득이 다음 목적지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생기는 수가 있다. 그때 보통 등산 자는 자기가 목표한 곳을 향해 곧장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자기도 모르는 착각에 의해 어떤 지점을 중심한 둘레를 빙빙 돌기가 일쑤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링 반데룽이라는 것으로, 사람에 따라 왼편으로 돌기도 하고 오른편으로 돌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세찬 눈보라나 짙은 안개 속에서 대개의 등산 자는 이 환상방황을 하다가 종내는 조난을 당하게 마련인 것이다.”(황순원 <링 반데룽>)
이렇게 설명해 놓고 작가는 본 줄거리로 들어간다.
“지금 친구는 등산이 아닌 자기 생활에서 일종의 링 반데룽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혹한 전쟁을 치른 한국이 전후의 피폐한 상황을 벗어나며 조금씩 경제적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을 때 작가 황순원은 미국의 챨리 채플린이 산업 사회에서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을 느꼈듯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 서 인간이 링 반데룽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빛을 창조했다. 그 흑암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은 장차 나타날 질서의 설계도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상상력이 창조적 능력이었고 사람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으로 그것을 빼앗겼고, 도둑이 그것을 훔쳐갔고, 강도가 그것을 강탈했고, 바다에 빠진 것을 해적이 가져간 것이다.
사람에게서 훔쳐간 창조적 능력 즉 상상력으로 도둑과 해적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창조했다. 그것으로 바벨탑과 성곽을 건설하고, 가나안 신화를 만들고, 수메르 신화를 만들고, 바벨론 신화도 만들고, 헬라 신화와 로마신화도 만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화려하고 매혹적이었다. 그 현란한 조명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던 인간의 안목은 모두가 소경이 되었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생명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먹이를 물어 나르는 개미도 있고, 변기통 주위를 열심히 돌고 있는 바퀴벌레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개미나 바퀴벌레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성경에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자들이 자신들을 ‘메뚜기’ 같다고 하여 꾸중을 듣는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것이니라”(민 13:33).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내 아들로 택했다고 했다(출 4:22). 그런데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의 체격이 좀 크고 힘이 세다고 해서 자신들을 메뚜기 같다고 했으니 하나님을 메뚜기 아버지로 만든 셈이었다. 겁먹은 정탐꾼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에게 무서운 조치가 내려졌다.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될 때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2~33).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 자손의 죄는 역시 그들 자신의 보물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포기한 죄였다. 절망하는 인간은 하나님도 그를 버린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이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곧 죄가 된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하나님은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만나자고 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그를 만나면 사람은 절망의 결박에서 풀려나게 된다.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4).
그리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창조주의 독생자가 왔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묻는 제자 도마에게 대답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이 새겨준 십계명의 돌판을 들고 시내산을 내려온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 경악하여 그것을 던져 깨뜨렸으나 하나님은 절망하여 돌아온 그에게 두 번째 돌판에 다시 말씀을 새겨 주었다. 그분이 보낸 두 번째 보물이 바로 그의 독생자였던 것이다.†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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