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부자가 그의 재산을 불의한 방법으로 모았다고 하더라도 법과 재판에 의하지 않고 그 소유를 빼앗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도 위반된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불의할 경우 힘없는 자들은 더욱 억울하게 된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사 10:1~2).

그들은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잡아먹는 목자와 같았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겔 34:3).
이런 경우에는 진정한 목자가 되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겔 34:10).
그 때까지 참지 못하면 강도가 된다. 악인의 재물을 노리고 담을 넘는 자가 도둑이고, 무기를 들고 침입하면 강도이다. 상인들이 떼를 지어 장사에 나설 때 그들을 평지에서 습격하면 마적(robbers)이고, 산에서 나타나면 산적(bandits)이다.
해상 운송이 본격화되면서 지역 간 교역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상선을 습격하는 강도를 해적(pirates)이라고 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해적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최초의 해상 무역은 지중해에 근거를 두었다. 따라서 해적들도 그 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선장의 소리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 해적은 소아시아 해안에 기지를 둔 ‘루카(Lukka)’였다. 그들의 활동은 이미 BC 14세기 전에 시작되었고, 키프로스를 습격하고 애굽과 맞서기 위해 히타이트 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루카 해적의 위세가 약화되면서 고개를 든 것이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해양 민족’이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블레셋의 조상이 되었다.

“내가 블레셋 사람 위에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25:16~17).
그렛(크레타) 해적의 피해를 가장 먼저 당한 것은 지중해 항로를 개척하고 지역 간 교역을 시작했던 두로(페니키아) 상선들이었다.

“시돈과 아르왓 거민들이 네 사공이 되었음이여 두로야 네 가운데 있는 박사가 네 선장이 되었도다 그발의 노인과 박사들이 네 가운데서 배의 틈을 막는 자가 되었음이여 바다의 모든 배와 그 사공들은 네 가운데서 무역하였도다”(겔27:8~9, 개역한글판).
두로 상선의 선장이 된 ‘박사’는 하늘의 별을 보고 배의 위치를 알아내고 바람의 방향을 따라 항로를 결정하는 항해사였다. 그러나 자주 해적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상선들은 자위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것이 곧 해적과 교전하여 제압하고 격퇴할 수 있는 군대, 즉 해군을 동반하는 방법이었다.

“바사와 룻과 붓이 네 군대 가운데에서 병정이 되었음이여 네 가운데에서방패와 투구를 달아 네 영광을 나타냈도다”(겔 27:10).
바사(페르시아)는 페르시아 만의 해적들로부터 상선을 보호했고 룻(루디아)은 에게 해의 해적을 막아내고, 그리고 붓(리비아)은 아프리카 연안의 해적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로의 상인들은 결국 해양 민족의 본거지 크레타 섬을 장악하여 미노스 문명을 건설한다. 크레타 섬은 두로 상인들의 특산품 ‘자주빛 염료(페닉스)’를 만드는 뿔고둥(murex)의 주산지였다.

“네 땅이 바다 가운데에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겔 27:4).
그러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지중해의 교역을 주도했던 두로의 상인들은 그곳에서 두로의 여신 ‘아스다롯’과 파포스에서 태어난 여신 ‘아프로디테’를 하나로 만들고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까지 끌어들여 음란한 밀교 의식을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술과 음란’이 온 지중해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두로 상인들의 고향 ‘두로’를 멸망시킨다.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겔 26:3~5).
에스겔의 예언대로 두로는 그들을 13년간 포위하고 있던 바벨론 군대에 점령당했다. 다시 BC 332년 알렉산더의 군대가 두로를 파괴하여 두로 성은 어부들의 그물 말리는 곳이 되었으며 BC 20년 두로는 로마에 편입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두로 상인들의 지중해 교역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의 행방을 쫓는다.“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함이여 동풍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무찔렀도다 네 재물과 상품과 바꾼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상인과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무리가 네가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 것임이여 네 선장이 부르짖는 소리에 물결이 흔들리리로다”(겔 27:26~28).
두로의 밀교는 오늘날에도 세상 문화를 지배한다. 두로의 ‘아스다롯’은 지금도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되어 온 세상 젊은이들을 음란에 빠지게 하고, ‘디오니소스’의 독주는 모든 남자와 여자를 비틀거리게 한다.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드는 ‘바알’의 문화는 모두 두로 즉 페니키아에서 온 것이며 자주빛 염료 ‘페닉스’는 ‘불사조’가 되어 세계 각처에 남아 있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겔 28:19).

왕과 부자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며 살게 되어 있다. 인간 스스로가 그 고통을 줄여보려고 만들어낸 것이 법과 질서였다. 그러나 그 법과 질서도 난폭자가 그것을 장악하게 되면 여전히 인간을 괴롭히는 그물과 올무가 되었다. 그리고 ‘왕’과 ‘부자’가 인간 위에 군림했다. 인간의 신음이 하늘에 사무치면 하나님은 공의를 지키는 왕과 부자를 세웠다.
본래 왕과 부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도가 아니었다. 왕을 원하는 사람들의 생각(삼상 8:7)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이고, 부자가 재물을 쌓아 두는 것도 역시 불신의 소치였다. 그러나 인간의 세상에서 악한 왕의 악행을 막으려면 공의로운 왕이 필요했고, 가난한 자를 도우려면 선한 부자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을 세우고 부자를 일으킨다.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단 2:21).
인간의 생각이 악한 데로 흐르면 악한 왕이 일어나고, 사람의 고통이 극도에 달하면 그에 대항하는 왕이 나타난다. 게으른 자가 많아지면 부자의 안색이 굳어지고, 가난한 자가 늘어나면 부자가 일자리를 만든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그러므로 악한 왕을 심판하고, 가증한 부자를 징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일에 하나님보다 먼저 섣불리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하나님이 그 때와 방법을 정하시기 때문이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전 10:20).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궁궐을 채우기 위해 보물과 재화를 실어 날랐고, 부자는 자기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 재물을 끌어 모았다. 하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나선 자들이 해적이었다. 왕과 부자의 배들은 늘 지중해에 떠 있었고, 지중해는 해적들의 더할 나위 없는 사냥터였다. 해적에게 필수적인 장비는 날렵하고 빠른 선박이었다.

“최초의 해적들은 노 젓는 해적선을 이용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해양민족과 크레타 해적들은 당대의 벽화에 보이듯이 일종의 갤리선을 이용했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크레타의 해적선은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귀로에 탔던 ‘트로이 앞바다의 검은 배’와 같은 것으로 양쪽에 10~15개의 노가 있고 갑판이 개방된 작은 배였다. 이 후로 상인의 무역선은 갑판이 넓은 갤리선을 건조했으나 해적들은 선체의 폭이 더 좁고 날렵한 배를 선호했고, 두로의 해군에 이어 그리스의 해군은 2~3단의 노를 갖춘 전함을 개발했다.
해적의 은신처로 유명한 터키 남부 해안의 길리기아 사람들은 사상 최대의 해적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애굽과 팔레스타인과 헬라 연안에 항해하는 선박들을 습격해 화물과 인간을 약탈했고, 크레타 노예 시장의 가장 큰 공급자였다. 심지어 그들은 지중해에 군림하기 시작한 로마의 국력을 위협해 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도 포로가 되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해적들의 기지는 지중해 전 지역에 확산되고 급기야 이탈리아 동쪽의 아드리아 해로 밀고 들어갔다. 일리리아와 달마티아까지 해적의 소굴이 되자 로마원로원은 ‘반해적법’을 제정하고 BC 67년, 폼페이우스 대장군에게 전함 5백척과 12만 명의 로마군으로 해적 소탕을 지휘하게 했다. 그는 지중해를 13구역으로 나누어 구역 사령관을 임명하고 작전을 시작했다.

“반해적 작전이 3개월에 걸쳐 완성된 결과, 해적들은 지중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소탕되었다.”(앵거스 컨스텀, <해적의 역사>)
그러나 해적이 소탕되었다고 해서 바다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해적 토벌로 민중의 인기를 얻은 폼페이우스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손에 넣고, 유다 지역의 하스몬 왕가의 분쟁에 개입하여 로마의 공납국으로 만들었다.
동방의 금은보화를 싣고 개선한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니아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부호 크라수스 등과 함께 3두 정치를 시작한다.
BC 53년,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던 크라수스가 전사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그를 갈리아 총독에서 해임하였고, 그는 BC 48년 4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서 로마를 점령했다.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애굽으로 간 폼페이우스는 애굽에서 살해당하고, 로마에 개선한 카이사르는 ‘독재관’이 되었다.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원로원 앞에서 측근인 브루투스의 칼에 암살당하자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고 암살자들을 제압한 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카이사르의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고,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애굽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모우지스 해더스, <로마 제국>)
정권 장악을 위한 로마의 내전은 악티움 해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며 로마의 공화정은 끝났고,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을 그들은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라고 했다. 그러나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속주들을 그 무력으로 수탈하는 합법적인 해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행을 주목하고 있었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시 29:3).†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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