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적자생존’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정글에서 동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신속한 판단이다.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이든 그들을 피해가며 살아야 하는 초식동물이든 그 판단이 신속하지 못하면 먹이를 구하지 못해 굶어 죽거나,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게 된다. 동물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본능’과 ‘경험’에 의존한다.
본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지니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수만 마리의 누(Gnu) 떼가 물을 찾아 이동하고, 수십만 마리의 연어 떼가 바다에서 그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그런 본능이 어떻게 그들의 기억 속에 입력되어 있는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성경에서는 모든 동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런 본능을 주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복’이란 누 떼가 하늘을 보며 천기를 예측하고, 바람의 냄새에서 우기와 건기를 구별하는 본능, 연어 떼가 해초의 감촉과 물의 온도에서 그 태어난 곳을 기억하는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이든, 물고기든 또는 새들을 생존하게 하는 것이고, 생육하여 번성하는데 필요한 능력이며 날 때부터 다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이러한 ‘본능’ 외에 또 필요한 것이 ‘경험’이다. 태어나면서 여러 가지 위험한 순간을 넘길 때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위험이 닥쳤을 때 에는 이미 늦어졌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경험들은 어미의 ‘교육’으로 사전에 주입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미를 잘 따라다니지 않는 새끼는 초원이나 정글에서 길을 잃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먹이를 찾는 방법도 처음에는 본능이었을 것이다. 포유동물의 경우, 새끼가 태어나면 어미의 젖을 찾아서 빨기 시작한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새끼는 어미의 젖을 찾아서 물고 빨아댄다. 그러나 젖을 뗄 시기가 되면 교육이 시작된다. 초식동물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육식동물은 어떻게 먹이를 잡아야 할지를 어미로부터 배운다.

복을 주시며



성경에 적힌 대로라면 세상에 많은 동물들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창세기 1장에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창조된 것으로 나오나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을 창조한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온다. 1장에서는 파티의 주빈이 가장 늦게 입장하듯이 사람의 위치를 대접한 것이고, 2장에서는 그 중요도가 가장 크기 때문에 맨 먼저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을 창조할 때에는 하나님이 크게 신경을 쓰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물고기나 새나 짐승에게도 생존과 생육과 번성을 위해 귀중한 본능 즉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새끼를 가르치는 법과 어미에게 배우는 능력을 주셨으니 하물며 사람에 대해서는 각별한 준비와 조치를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본능’이라고 한다면 어떤 본능을 준 것일까? 누 떼처럼 하늘을 보며 기상을 예측하고, 바람의 냄새에서 우기와 건기를 구별하고, 해초의 감촉과 물의 온도에서 태어난 곳을 기억하는 그런 본능일까? 그러나 ‘다스리는’ 존재가 될 사람이 태어난 곳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하나님의 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러므로 사람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갓 태어난 새끼가 어미의 젖을 찾듯, 자신의 창조자이며 양육자를 찾는 본능이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그러므로 사람의 기억 속에 입력된 ‘본능’에는 자신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며 그 분의 손이 나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세상의 어떤 동물도 창조주의 존재를 깨닫는 동물은 없다. 사람과 95% 이상의 유전자가 같다는 원숭이도 하나님을 아는 원숭이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에게’ 빌거나 부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창세기 1장에는 사람의 기억 속에 입력된 창조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것은 다른 동물의 유전자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처음 창조된 사람이 아직 눈을 뜨기 전에 작성된 ‘영적’인 지도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된 사람에게만 전수된 것이다. 그 지도를 따라 들어가면 사람은 창조를 위해 나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첫째 날에는 빛이 창조되고,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이 분리되고, 다음날에는 물속에서 뭍이 드러나게 됨으로 바다와 육지가 생겼다. 또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의 운행에 따라 시간이 계산되어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가 시작되고, 그에 따라 낮과 밤이 번갈아 들게 된 것이다.

위험한 출발



동물의 태어난 새끼가 그 어미의 품속에서 눈을 떠 주변의 환경을 익히기 시작하듯, 하나님의 손에서 지음을 받은 사람도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한 아늑하고 포근한 장소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
처음 태어난 사람이 먹을 것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사람도 눈을 뜨며 그 주변의 환경을 익히기 시작한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0~14).
이 네 강의 이름 중 힛데겔(티그리스)과 유브라데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강 이름과 지역 이름은 오늘날 메소포타미아나 아프리카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대홍수 이전의 육지 즉 ‘판게아’는 홍수 기간에 다 물에 잠겨버리고, 지금의 각 대륙 모양으로 갈라져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덴’의 네 강도 위치가 바뀌었거나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를 통과한 노아의 자손들은 조상들에게서 들은 그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라랏산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강이나 지역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스페인이나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개척하거나 정착했던 지역의 이름들을 자기네가 살던 스페인이나 영국의 지명으로 불렀고,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를 그냥 옛날이야기처럼 읽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기쉬운 두 가지 ‘중요한 일’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하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서 ‘경작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곳을 ‘지키게’ 하셨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에덴’ 동산은 살기 좋은 낙원이고, 일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었을 것 같은데 왜 ‘경작’이 필요했을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과 그 아들의 관계가 ‘일’로 이어져 있듯,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역시‘일’로 연결된다.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가 안일과 쾌락으로만 이어진다면 그것은 곧 권태와 파멸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하는 자’와 함께 일하는 기쁨을 얻기 위함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사람에게 그것을 ‘경작하게’하고 또 하나의 그에게 준 임무는 그것을 ‘지키게’ 한 것이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지키게 했다는 것은 그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에덴 동산에 하나님과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곳을 노리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도 있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마치 짐승의 어미가 그 새끼에게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교육하듯 하나님도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셨다. 여기서도 ‘에덴’이 그저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 아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에덴’에 그런 위험한 나무를 심어 놓으셨고, 그곳을 ‘지켜야’ 할 만큼 불안한 곳으로 창설해 놓았던 것일까? 사실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자체가 큰 모험이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그것은 곧 ‘혼돈’에서 ‘질서’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아픔’이 있어야 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대격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큰 모험일 수도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인데 그‘사랑’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가 필요하고, 명령과 복종이 아닌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나 그 선택은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짐승의 경우에는 대개 새끼가 그 어미의 가르침을 따르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의 호기심은 짐승의 그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 강한 호기심도 역시 하나님이 준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의 실패는 거의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욥 3:23).†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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