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칼럼

맛보기가 작은 천국을 이룬다

우리가 정말 맛보기에 취하면 진짜보기를 위해서 뭘 못하겠는가. 우리가 영원한 내세와 천국의 맛보기 은혜를 입었다면 그 진짜보기를 위해서 어떤 순종과 헌신을 못하겠는가.

옛날 어린 시절 엿장수 아저씨의 맛보기를 기억하는가? 엿장수 아저씨는 새끼손가락 절 반만큼 엿을 끊어서 아이들에게 맛보기로 나눠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맛보기를 보고 달콤함에 반해 버린다. 그 후로 엿장수 아저씨가 동구 밖에서부터 짤그락짤그락 가위소리를 내며 마을로 들어설 때면 어느새 파블로프의 법칙에 의해서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군것질감이라곤 거의 없던 시절, 단것이 그렇게도 귀했던 시절에 시골 아이들에게 엿 한 가락은 황홀하리만큼 큰 별미였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뭐 바꾸어 먹을만한 고물이 없는지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헌 옷이나 떨어진 고무신, 빈 병, 헌 책, 찌그러진 양재기, 심지 어는 머리 빗을 때 빠진 어머니의 머리카락 뭉치까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들고 엿장수에게 달려간다. 그것도 없으면 도랑이나 쓰레기통까지 뒤지며 빈 병이나 고물, 철사뭉치를 다 주워 모았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너무 알뜰해서 한 번도 엿을 사준 적이 없다. 그저 빈 병이나 고무 신짝을 모아서 좀약이나 성냥, 비누 등으로 바꿔왔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어머니는 너무 엿 사주는데는 야박하셨다. 그러니까 맛보기에 헷가닥한 나는 엿 한 번 실컷 먹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쟁기질 하는 쟁기보습을 빼어다가 엿을 사 먹고 싶은 모험을 감행했다. 그 무거운 쟁기보습을 엿장수 아저씨한테 갖고 갔더니 눈이 휘둥그레지 면서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걸 네가 어떻게 가져왔냐? 너 도적질 한 것 아니냐? 너네 아버지한테 혼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때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아저씨, 내가 학교에서 웅변도 잘하고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받아왔다고 아버지가 얼마나 칭 찬하신 줄 아세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으면 이 쟁기보습을 빼 주셨겠어요? 어서 엿이나 주세요.”
그러자 아저씨가 엿 판 위에 있는 엿을 끊어주는데 거반 한 뼘이나 되게 넓게 끊어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너무 좋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급기야, 꿈에도 소원이었던 그 엿을 들고 뒷산으로 달려가서 입이 돌아가고 코빼기가 비뚤어지도록 다 먹었다. 아마 그 때 내가 틀니를 박았으면 이가 다 빠져 버렸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보기가 이렇게 꿀맛이던가, 맛보기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진짜보기가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달콤하게 만드는가.’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한테 다리몽둥이가 부러지도록 두들겨 맞았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던지 발길로 내 얼굴을 걷어차신 것이다. 그때 내 눈에 얼마나 불이 번뜩번뜩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후회함이 없었다. 진짜보기의 맛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트림의 단맛은 진짜보기의 행복을 더해 주었다

진짜보기를 사모하라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보기식으로 주셨다. 바울이 말한 대로 부활 세계의 삶을 우리 내면에 맛보기로 주셨다는 말이다(롬 8:11).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부활 세계의 삶을 우리 삶 속에 도입하셔서 영원한 천국의 삶, 영원한 내세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경험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현세에서도 하늘나라의 영광과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천국의 소망뿐만 아니라 내세의 감격과 기쁨과 영광이 우리 삶 속에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진짜보기는 천국 가서 누리게 된다. 그 진짜보기의 영광과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큰 줄 아는가? 그 감격과 영광은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만약에 우리가 육체를 가진 몸으로서 그 진짜보기의 영광과 황홀함을 이 땅 에서 누리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미쳐버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맛보기의 축복만 맛보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맛보기에 취하면 진짜보기를 위해서 뭘 못하겠는가. 우리가 영원한 내세와 천국의 맛보기 은혜를 입었다면 그 진짜보기를 위해서 어떤 순종과 헌신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맛보기의 축복과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니 까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맛보기의 진미를 잃어버리니까 참된 섬김과 희생, 충성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와서 군림하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움만 하지 무 슨 섬김과 희생이 있느냔 말이다. 아니, 자신의 도덕성과 윤리성 안에 갇혀서 자기 기준으로 목회자를 공격하고 교회 영광성과 도덕성을 끌어내리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은 천국과 내세의 그 황홀한 맛보기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껍데기 신앙, 껍데기 천국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과 내세의 축복 을 우리 삶에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맛보기를 제대로 경험하면 진짜보기의 능력도 소유할 수 있다. 그 능력이 무엇인가? 우리 안에 분열과 싸움을 조장하는 사탄의 이간질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디 가서든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의 꽃씨를 뿌린다. 하나님나라 가 무엇인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 아래서 온 형제, 자매가 사랑으로 하나 되 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왜 다투고 싸우는가? 천국과 내세의 참맛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 대, 맛보기를 제대로 경험했는가. 진짜보기를 사모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있는 곳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라. 화해의 꽃씨를 심어라. 그럴 때 당신의 작은 꽃씨가 그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한국교회를 하나 되게 할 것이다.†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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