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먼 바다로 가는 자여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120명의 제자들과 그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그 증인이 되기 위해 온 땅에 흩어졌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를 당했고, 돌에 맞아 죽기도 했다. 초기의 박해자들은 주로 각지에 나가 살던 유대인들이었고, AD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한 후로는 로마 제국이 박해의 전면에 나섰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8).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후로 모든 사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서 도끼에 맞아 죽었고, 나다나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전신의 가죽이 벗겨져 순교했다. 셀롯인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톱에 썰려 죽고, 다대오, 안드레, 마태, 빌립, 도마도 순교했다. 요한은 유배지 밧모 섬에서 돌아와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쓰고 최후를 맞았다.

그 외에도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당한 순교자들의 수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박해의 기간은 너무 길었다. 그래도 배고픈 자를 먹이고, 아픈 자를 돌보고, 갇힌 자들을 위로하는 그들의 착한 일을 보고 믿는 자의 수가 크게 불어나 로마 시민의 절반에 이르렀다. 마침내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믿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규범에 의해 신에 대한 찬미와 공경은 보장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과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이 선택한 예배 방식을 따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콘스탄티누스, ‘밀라노 칙령’)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부당하게 몰수한 재산을 반환 할 것이며, 그들이 전도를 하거나 자신들의 예배 처소를 건축할 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 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그동안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 왔는데 이제는 로마의 황제가 그리스도인의 후원자로 바뀐 것이다. 복음은 로마의 도로망을 타고 열방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 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길은 땅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다에도 있었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열방의 바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제 정말로 성경의 ‘천년왕국’이 임한 것으로 여겼다. 숨어 다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황제가 하사한 라테라누스의 호화 저택에 입주했다. 지난날 다윗이 호화로운 왕궁에 살면서 하나님께 송구하여 성전 건축을 계획했듯이 교회 지도자들이 성당 건축을 시작하자, 부자들은 다투어 헌금을 했다. 모든 열방에 아름다운 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감격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박해 시대의 교회에는 사랑과 열정이 넘쳤는데 황제의 후원을 받으면서 힘이 강해진 교회에는 갑자기 열광과 독선이 넘쳐 나게 된 것이다. 박해 시대의 원한과 분노가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이교도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AD 41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히파티아 살해 사건이 바로 그런 사례였다.
히파티아는 AD 370년 알렉산드리아의 수학 교수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부친에게서 수학,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 문학과 수영, 승마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고, 아테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디오판토스의 ‘수론’과 아폴로니오스의 ‘원추곡선’,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관한 해설서를 써냈다.
AD 412년 키릴로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부임하면서 히파티아의 비극은 시작되 었다. 유대인 박멸에 나서서 회당을 파괴한 키릴로스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행정장관 오레스테스와 가깝게 지내는 히파티아를 이교도로 지목했다. 그는 학문과 과학을 기호화 하는 히파티아의 수학을 이교 사상이라고 몰아 폭도들을 시켜 강의하러 가는 그녀를 납치해 살해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마지막 수학자인 히파티아의 운명은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종언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교 광신자들에게 손, 발이 떨어져 나가고 시체가 거리에 내팽개쳐지는 처참한 지경을 당했다. 이 천재적인 여성 학자 히파티아 의 운명은 바로 헬레니즘 사상의 운명이기도 했다.”(안재구, <수학문화사>)
히파티아의 운명은 또한 황제의 후원을 선교의 동력으로 삼았던 로마 교회의 미래를 묵시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창세기에 기록된 홍수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의 멸망 그리고 가나안에 대한 처단 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진행된 사건들을 간결하게 압축해 놓은 것이어서 하나님이 마치 성급한 심판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오래 두고 인내하는 분이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으나 율법주의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렇게 해서 돌로 치려던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에 맞아가며 전도에 힘쓰던 그리스도인들은 후일 황제의 후원으로 힘을 얻게 되자 오히려 사람을 돌로 치게 되었고, 하나님이 아닌 율법을 의지하게 되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 65:5).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2009년 히파티아 사건을 소재로 하여 영화 「아고라 (광장)」를 제작했다. 히파티아 역을 맡았던 레이첼 와이즈의 지적인 모습과 “키릴로스는 로마 교회의 성자가 되었다”는 마지막 자막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으로 하여금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


명상의 바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교회는 오랜 박해에서 벗어났다. AD 319 년에는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금지되었으며 이듬해에 시민들의 일요 휴무령이 반포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국교로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국교화 하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교리의 일치’였다. 특히 ‘삼위일체’의 교리에서는 아리우스파와 알렉산더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의 존재가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같이 만들어진 존재이며, 가장 먼저 출생했고 창조의 대행자이나 영원한 분은 아니다.”
그것이 아리우스(Arius)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처음부터 계시는 영원한 존재라고 했다. 신의 본성을 놓고 사람이 논쟁하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나 그 판정을 황제가 주재한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알렉산더가 죽자 큰 신학자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5~373)가 알렉산더파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신이 되게 하려고 그 자신은 인간이 되셨다.”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는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번복을 거듭했다.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판결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 337년 사망하자,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차남 콘스탄티우스가 정권을 잡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아다나시우스를 축출했으나 AD 379년 아다나시우스를 추종하는 니케아 신앙의 지지자 데오도시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여 이듬해 칙령을 반포했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인들에게 가르친 신앙을 지키라.”
혼란스러운 교리의 정리가 잘 마무리된 것은 다행한 일이나 교리 논쟁이 정치적 투쟁과 얽히면서 교회는 점차 권력화 되고 세속화되어 갔다.
“황제의 개입이 그토록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투쟁으로 인하여 제국적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고, 황실의 개입이 정책상으로 완전히 이루어졌다.”(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의 주임 사제였던 레오Ⅰ세(440~461 재위)는 본격적으로 교황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모든 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수위권을 가진 로마 교회의 주임 사제에게 복종할 것을 명한다.”(AD 445,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Ⅲ세의 칙령)
더구나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황제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교황권은 황제보다 상 위에 서게 되었다. 권력이 집중되면 부패가 따르는 법이다. ‘천년왕국’이 된 교황청에는 학개 선지자가 말했던 ‘보화’가 쌓이게 되었다.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6~8).
교회의 권력이 커지면서 세속화 현상이 심화되고, 교회가 점차 조직화, 규율화, 제도화되어 가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신앙인들은 금욕과 경건을 추구하며 물질적 가 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세상을 떠나 은둔하여 기도 하고 명상하는 ‘수도원’이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애굽의 코마에서 태어난 안토니우스(Anthonius, 250~356)는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 전 재산을 처분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외딴 동굴에 들어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시작이었다.
“안토니우스를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워커, <세계기독교회사>) 군인이었던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46)는 20세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애굽 남
부의 타베니시에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을 설립하고, 예배 의식과 생활 규칙 등을 만들어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었다. 바실리우스(Basillius)는 소아시아에서 수도원 운 동을 이끌며 노동, 기도, 성경 읽기에 중점을 두었고, 아다나시우스는 서방 쪽에 수도원 운동을 소개했다.
마르티누스의 고올 수도원, 암브로시우스의 밀라노 수도원, 카시아누스의 마르세이 유 수도원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고, 베네딕투스가 세운 이탈리아 카시아노 산의 수도원 은 유럽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을 학문과 신학의 전당으로 만들어 놓은 공로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일 것이다. 그는 알제리아의 누미디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악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선의 결핍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의지를 가리키 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학문을 추구하던 그가 AD 386년 회심한 것은 모친 모니카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말한 다. 이듬해 그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세례를 받았다. 히포의 협동주교로 임명된 그는 서북 아프리카 지역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사제훈련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삼 위일체를 감동적인 언어로 설명했는데 ‘기억-이해-의지’ 또는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등이었다.
“인간의 좋은 점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러한 좋은 점들이 영원한 생명을 보수로서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은총이란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그 보물을 찾아낸 것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 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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