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⑨|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창조주의 손으로 지으신 사람이 늘 악한 일을 계획하고, 잔혹한 일을 거침없이 저지르게 되자 하나님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끊으셨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창 6:3).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하자 하나님은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 끝 날이 내게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그리고 홍수가 끝나자 노아가 보았던 그분의 마음이 드러났다.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어려서부터’라는 말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어도 흙으로 빚어낸 사람의 마음이 아직 어려서 그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사람이 하나님과 사랑을 하려면 고난을 통해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려 자라나게 해야 했다. 홍수는 끝났으나 다시 호된 훈련의 과정에 들어서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셨다.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창 9:11).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다시 시작되는 연단의 과정에서 또 그분을 원망하며 악행에 빠질 수도 있음을 예상하시고 얼굴을 가리셨다.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 31:18).

실로가 오시기까지


얼굴을 가리신 하나님은 삼손이 그 사랑하는 여인의 재촉에 못 이겨 자신의 비밀을 일러주었던 것처럼 때로는 손을 들어 부르짖는 자에게 그 마음을 일러 주시기도 했다. 그래도 일러 주신 후에는 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 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헷갈리기도 한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사 28:13).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여호수아’에 대한 오해였다. 하나님께서 ‘영이 머무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라고 하셨으므로 모세는 그를 후계자로 삼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이름을 지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가 곧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고 오랫동안 인식하고 있었다. 그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요”(민 13:8).
그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적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각기 다른 지파에서 일어난 사사(士師, Judge)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지켜냈으나, 장자권을 자임한 에브라임 지파는 자기네가 차지한 에브라임 산지에서 오랫동안 군림하며 살았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렇게 오만했던 것은 야곱의 유훈 때문이었다. 야곱은 죽기 전에 그 아들들을 불러서 후일에 당할 일을 일러 주었는데 먼저 그는 장자 르우벤이 그 서모 빌하와 사통한 일 때문에 그에게서 장자권을 박탈했다.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창 49:4).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벌였던 잔혹한 사건 때문에 제외되었다. 그래서 결국 장자권이 넷째인 유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 49:8).
그리고 야곱은 한 번 더 그것을 강조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실로’는 본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을 설치했던 장소를 말하나 야곱이 언급한 이 ‘실로’는 그 문맥으로 보아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실로’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메시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실로’가 평강을 의미하는 ‘샬라’에서 온 것으로 보아 ‘평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로 해석한다. 쿰란 문서인 ‘족장의 축복’에서도 실로는 ‘의로운 메시야’로 해석되어 있다.

그러나 열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다음 아들들을 거쳐 요셉에 이르자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요셉은 네 명의 아내들 중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소생이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애굽에서 유능한 총리가 되었고,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은 거기서 17년을 더 살았다. 가장 사랑했던 요셉의 차례가 되자 야곱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 49:24, 개역한글).
그렇게 축복하고도 덕담을 더 얹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 위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그 이전에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 48:14).
손의 위치가 바뀐 것 같아 요셉이 바로잡으려 했으나 야곱은 듣지 않았다.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
야곱이 그렇게 한 것에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야곱의 모친 리브가가 쌍둥이 형제를 잉태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나게 한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얹은 것은 나중에 되어진 사실들로 보아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인간적 의도가 깔렸을 수도 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에브라임 지파는 큰 지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후일 열 지파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이스라엘 분단의 원인이 되었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다가 먼저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사 28:1).

나와 너 사이에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행적을 보면 그에게서 ‘실로’의 소망을 이어갈 만한 일들이 발견되고 있다. 유다는 처음에 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을 때 그가 우리의 혈육이니 죽이지 말고 장사꾼들에게 팔아넘기자고 제의했다.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창 37:27).
후일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갔을 때 요셉은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잡아 두기 위해 그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게 했다. 그리고 총리의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어 잡히게 되자 유다가 총리 앞에 나서서 탄원한다.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창 44:30~31).
유다는 자신의 아들 엘과 오난이 죽은 후로 자식을 잃은 아비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다는 베냐민 대신 자신을 잡아달라고 간청한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 44:32~33).
그러자 총리가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그의 수하들을 물러가게 한 다음 형제들에게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밝히고 형들과 입을 맞추며 울었다. 이런 화해를 이끌어낸 것은 곧 자신이 대신 잡히겠다고 나선 유다의 진심 때문이었고, 이는 바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마음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유다의 자손 가운데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그러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인기가 치솟은 다윗을 사울 왕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울며 다윗을 피신시킨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삼상 20:42).
다윗은 유다 지파였고 요나단은 베냐민 지파였다. 다윗의 조상 유다는 베냐민을 위해 대신 잡히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베냐민의 자손 요나단이 유다 지파의 다윗을 살려 준 것이다. 그 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요나단은 전사했고 패전한 사울 왕은 자결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성경에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이 회중을 이끄는 지도자를 세우실 때 기름을 부었는데 제사장을 세울 때, 선지자를 세울 때, 그리고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 모세가 또 다른 선지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면 다윗은 장차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 것이다.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겔 37:25).
이스라엘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실족과 그 아들 르호보암의 실책으로 분단될때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을 따라 열 지파가 북으로 올라갔고, 남쪽에는 오직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아서 왕국을 유지했다. 북왕국은 BC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했고, 남쪽의 유다는 120여년을 더 유지하다가 바벨론의 침입을 받아 BC 586년에 망해서 많은 왕족들과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BC 538년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파괴된 성전의 재건을 추진하고 있을 때 성경에는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당시 재건을 주도한 사람은 유다 지파의 건축 기술자 ‘스룹바벨’이었고, 그 때의 대제사장은 ‘여호수아’였다. BC 520년 잇도의 손자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탄이 그를 대적하는 환상을 보았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슥 3:2).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고 정결한 관을 씌우셨다. 그는 장차 ‘선지자’이며 ‘왕’이 될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분의 ‘대제사장’이 되실 것임을 예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580년이 지난 후 유다와 베냐민의 관계는 한 번 더 이어진다. 베냐민 지파 출신의 바리새인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1천500년 전 모세가 여호와의 사자를 향해 물었듯이 그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리고 다시 그분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5~6).
그 이후로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유다 지파의 목수 요셉의 손에서 자라난 예수는 바울을 생명의 길로 인도했고 베냐민 지파 출신인 바울은 그분의 말씀을 이방에 전하다가 순교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유다와 베냐민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사랑은 다시 예수와 바울에게로 이어져 온 세상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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