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⑦|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과의 완벽한 사랑을 하기 위해 사람에게 ‘자유’라는 위험한 선물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이 그 ‘자유’를 내세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그분을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사는 쪽을 선택하자 하나님은 큰 충격과 아픔을 당하시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창 3:23).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긴 고통의 광야를 통과하며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분의 사랑은 오랜 시련의 기간을 거쳐야 했다. 사람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셨던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하시지 않고 그분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 지라”(창 4:4~5).

의로운 자의 증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지 않고 그분을 떠나서 자기 방식대로 사는 쪽을 택한 것이 사람의 권리였다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을 받은 것도 하나님 쪽의 권리였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에도 그 기준은 있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알려 주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
 가인은 그 아우 아벨에게 인색하여 선을 행하지 못했고, 그 정곡을 찌른 하나님의 지적에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그분의 선택이 장자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여겨 아벨을 쳐 죽였다. 가인의 분함은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정작 그가 분노했던 대상은 아벨을 선택한 하나님의 권위였다. 그리고 지금도 인간의 권리를 하나님의 권위 위에 세우려는 자들이 아벨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그리고 아벨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고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개역한글).
 사람은 광야에서 닥쳐오는 고통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당하며 살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 고통의 의미와 가치가 본래 무엇인지 일러주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것마저 사람이 겪으며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사 8:16).

 그러나 또 한편으로 사람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깨닫고 습득하게 도와주는 방법을 궁리하셨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한 선택된 사람의 삶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예표(豫表)’로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사 8:18).
 여기서 ‘징조(sign, 히:오트)’는 주로 자연현상을 통해 다가올 일을 보여 주는 것이고 ‘예표(wonder, 히:모페트)’란 미래에 전개될 사건을 특정한 인물의 삶을 통해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인데 예표는 주로 하나님이 택한 인물을 통해 계시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려주듯 그분의 비밀을 모세에게 일러 주신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하나님의 비밀은 그분의 선택을 받고 사랑받는 관계 속에서 ‘예표’로 사용된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복선처럼 은밀하게 깔리고 있었다. 그런 사례들 중의 하나가 가인의 사건 이후 매우 혼잡했던 시대에 태어난 ‘에녹’이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에녹이 비록 365세를 살았다고 하나 당시 셋의 계보를 보면 셋은 912세를 살았으며, 그 아들 에노스는 905세, 다음의 게난은 910세를 살았다. 또 에녹의 조부 마할랄렐은 895세, 부친 야렛은 962세를 살았고,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도 969세, 손자 라멕은 777세를 살았다. 에녹의 증손 노아는 홍수를 통과해 950세에 죽었다. 그렇다면 에녹은 그 조상들과 그 자손의 절반도 못산 셈이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결국 땅에서 몇 살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데려갔다’는 대목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왜 그를 데려가셨을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데려갔다’는 말은 에덴 밖의 세상이 더 이상 정착해서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세상은 사람의 수준을 높이는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에녹은 이 광야의 고통과 훈련을 다 마치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모든 성도들의 예표가 되었다. 또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는 대목 역시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감을 당할 성도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또 ‘에녹’은 땅에 무덤을 남겨 놓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의 예표가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후일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 17:2~3).
 그 광경을 보고 놀란 베드로는 세 분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예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하신 후 산에서 내려 오셨다. 그분이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사흘 만에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그분을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나그네의 동행자


 홍수 이전의 인물인 에녹을 들림 받는 자의 예표로 사용하신 하나님은 다시 그분의 선택권을 행사하여 에녹의 4대손 ‘노아’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무서운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한 노아는 땅과 하늘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버린 홍수를 건너 새로운 땅을 밟게 되었다. 그도 역시 험한 세상에 태어나 덮쳐오는 풍랑을 뚫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성도들의 예표가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설계를 따라 건조한 방주는 ‘교회’의 상징이 된 것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방주를 건조하려면 배를 건조하는 건축 기술과 거대한 물자를 다루기 위한 기구들의 제작 기술, 그리고 파도를 넘어설 수 있는 항해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기술은 모두 가인의 자손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농사밖에 모르던 그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가인의 성에 가서 그 기술을 배웠다. 셈은 건축 기술, 함은 기구 만드는 기술, 그리고 야벳은 항해 기술 등을 배웠다가 방주를 건조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9:26).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 중 건축 기술을 지닌 셈을 장자권자로 선택했다. 그는 장차 새로운 맏아들로 세상에 와서(롬 8:29) ‘교회’의 머리가 될 독생자의 예표가 되었다. 기계 기술을 지닌 함의 자손 중에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사기꾼 니므롯이 태어났고, 항해 기술을 지닌 야벳의 자손은 바다의 신을 섬기다가 우상의 문화에 빠졌다.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창 10:5).
 메소포타미아에 큰 성들을 건축하고 형제들을 다스리던 셈의 장자권이 니므롯의 반란으로 붕괴되자 하나님은 다시 셈의 손자 에벨을 선택하셨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창 10:21).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에서 셈의 계보에는 누가복음 3장의 계보에서 빠진 사람이 있다.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고 에벨은 벨렉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다윗에서 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누가복음의 계보에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눅 3:35~36).
 누가는 헬라인이어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을 대본으로 했는데 그 ‘70인역’에도 역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 창세기의 외경에 의하면 가이난은 니므롯이 바벨탑을 건축할 때 셈 가문의 건축 기술을 제공해서 파문된 것으로 보인다.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도시를 공략하러 나섰다가 일월성신으로 점을 쳐서 죄를 범했다. 그의 아들 셀라는 삼촌 게세대의 아들 에벨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고, 에벨은 벨렉을 낳았다.”(쿰란 문서 ‘요벨’ 제8장)

 셈의 장자권이 니므롯의 반란으로 붕괴되었을 때 벨렉의 형제 ‘욕단’의 자손은 동방으로 옮겨갔고, 에벨은 알레포 남쪽에 ‘에블라’를 건설했으나 에벨의 자손들은 다시 아모리 족속의 침입을 받아 몰락하여 유랑민이 되었다. ‘히브리’라는 이름은 에벨 즉 ‘헤버’에서 온 것이고 유랑민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에벨의 자손 중에서 다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하란에 정착해서 살던 아브라함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개역한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해 겨우 살만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을 불러내서 정확한 지명도 없이 그냥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아브람이 의아하게 여겨 당황할 것을 짐작하신 하나님은 그가 솔깃할만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2, 개역한글).
 결국 그는 자신이 한 분뿐이라고 믿었던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유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성을 바랐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오직 장막에서 살았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에게는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기다렸다가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삭을 선택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그 이삭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나그네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랄 골짜기에 거주했으나 거기서 우물을 팔 때마다 그랄 사람들이 자기네 소유라고 주장해 다투었으므로 계속 장소를 옮겨가며 우물을 파다가 브엘세바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을 선택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부친을 속여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형을 피해 밧단아람에 있는 외가로 도망하여 살다가 70년 만에 열두 아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3년 후 잃었던 아들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애굽 왕 바로 앞에 섰다. 바로가 그에게 나이를 묻자 그가 대답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그로부터 다시 430년이 지나 하나님은 그 야곱의 자손 중에서 미디안 광야로 나가 40년간 양을 치던 나그네 모세를 찾아내 야곱의 자손을 애굽에서 끌어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모세를 데리고 애굽 왕 바로에게로 가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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