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칼럼

다시 광야에 서다

주께 질문합니다


신앙이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의롭고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그러나 사람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그분의 처사가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신앙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역시 그런 갈등이 생길 때마다 서슴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다.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질문을 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의와 공평이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 세계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이 공평의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해야 할 나라는 바로 한국이 아닐까 싶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물론 모든 나라가 환난과 역경을 당하고 전쟁을 겪어 왔으나 탐욕이든 패역이든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그리고 한국 역시 그 조상들의 때부터 저지른 불의하고 악한 죄들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조상들의 죄이든, 자신들의 죄이든 그 저지른 잘못에 상응하는 환난과 재앙을 받을 만큼 받아 왔다. 한 번도 타국을 침략해본 적이 없는 우리 조상들은 고대로부터 요하 서쪽에 자리 잡은 큰 나라들의 침략과 박해를 겪었고, 고려시대에는 137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조선왕조 역시 두 차례의 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끝에 결국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와 수탈을 당했다.
1914년 유럽인들의 전쟁놀이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5년간 7백만 명을 희생시키고 끝난 지 20년 만에 다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에 맞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일본제국이 가담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 역시 끌려들어갔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군인 1천600만 명, 민간인 3천500만 명 가운데 한국인 희생자도 포함되었다.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슥 11:7).
그러나 더 기막힌 것은 전쟁의 결과였다.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하던 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휴전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유대인을 6백만 명이나 학살한 패전국 독일과 동양 각국에서 수백만 명을 전쟁에 몰아넣고, 인체실험까지 자행한 일본은 굴지의 경제대국이 되어 잘 사는데도 한국은 아직 분단의 고통 속에 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 아직 설명해 주지 않고 계신다. 한국은 성경에서 영문을 모른 채 재산과 자식을 다 잃고 건강마저 잃어 버린 채 잿더미 위에 앉아 있던 욥과 영락없이 닮아 있다.
“한국은 지난 5천년 동안 숱한 수난을 겪었고 욥처럼 자신과 자신의 운명에 충실해 왔다.”(비르질 게오르규, 1986.4.4. ‘매일경제’)
성경 속의 욥은 그런 수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한국 역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한숨만 쉬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러나 욥은 자신이 당하는 수난의 이유만은 알고 싶어 했다.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0:2).
욥은 끈질기게 묻는 질문의 대가였다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그리고 마침내 욥은 그 ‘공평’의 문제를 꺼낸다.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 31:6).
이 소원이야말로 일본이 뛰어든 전쟁을 위해 하시마(軍艦島)를 비롯한 여러 탄광과 공사장에서 참혹하게 숨져간 이 땅의 사내들과 원수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해 ‘정신대’로 끌려가 치욕을 당한 어린 소녀들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이 나라는 갈라져 나간 동족이 만든 핵무기와 미사일의 위협에 떨고, 나라의 살림은 중국의 사드 보복과 미국의 통상 압박에 짓눌려서 허덕거리고 있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4).

낮추시는 분의 뜻은



홍수 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둘째인 함의 손자 니므롯이 셈의 성들을 점령하자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인 에벨의 자손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즉 히브리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 히브리인 중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더니 그의 자손 70명을 애굽으로 들여보내 430년 동안 연단하신 후 그들이 2백만 명 정도로 불어나자 모세를 보내 그들을 끌어내 다시 40년간 광야를 걷게 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그 광야에서 히브리 백성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만나’ 뿐이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토록 혹독한 훈련을 시키신 이유에 대해서 당시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길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애굽에서의 430년과 광야의 40년 훈련을 끝낸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BC 1406년 여호수아의 인도로 그들이 약속받은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그들에게 한 가지 경고를 남겼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모세의 염려는 한 걸음을 더 나간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7~18).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다른 신들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게 된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 8:19).
과연 모세가 염려한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배가 부르게 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땅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싸우다가 먼저 북쪽의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쪽의 유다는 바벨론에 끌려가 애굽에 있을 때처럼 종의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의아들(Son of God)’이 다시 ‘사람의 아들(Son of man)’로 전락한 것이다.
바벨론 시대의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대언자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에스겔을 부르실 때마다 그를 ‘인자(人子. Son of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신다. 에스겔서에는 그 ‘인자’라는 호칭이 93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사람의 아들’이 되어버린 자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그분의 독생자(Son of God)’를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보낼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겔 18:25).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늘 자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라고 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2:10).
그리고 그 인자의 복음이 한반도에도 들어왔다.
“무덤의 문을 깨치신 그가 빛과 자유를 이 나라에 가져다주소서.”(1885.4.5. 헨리아펜젤러 ‘제물포 상륙 기도’)
일본의 지배와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국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일하고 벌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던 욥처럼 자원도 없고 재산도 없고 기술도 없던 맨손의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그 수출 규모가 세계 2백여 나라 중 10위 이내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배가 부르고 은금이 증식되자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모세의 그 염려가 한국에도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 당시의 ‘다른 신’이란 이방의 우상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손으로 만든 신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 자기 이념, 자기 사상이 곧 우상인 것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여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배교의 시대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가신지 2천년이 되어가고 있다. 성경이 예고한 재림과 심판의 징조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유의해서 볼만한 대목이 있다.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살후 2:3~4).
‘불법의 사람’이란 곧 마지막 때에 자신의 자리를 하나님의 권위보다 높이 세우려는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배교하는 일’이 먼저 있은 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교’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2001년 네덜란드를 필두로 시작된 동성결혼 법제화가 2013년에 중대한 분기점을 맞는 양상이다. 전면 허용 14개국 외에 미국, 브라질, 멕시코는 지역별로 허용하고 있다.”(2013.5.29. 동아일보)
네덜란드는 물론 14개국 중 벨기에, 캐나다, 남아공, 뉴질랜드가 모두 기독교 국가이고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덴마크는 십자가를 국기로 사용하는 나라들이며 스페인,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은 가톨릭 국가이다. 왜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은 바로 창조질서를 대적하는 행위이며 창세기에서 멸망한 ‘소돔’은 ‘동성애의 성읍’이었다.
이런 시대에 해외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해 보면 ‘교회’의 몰락과 붕괴 현상을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과거에 마을마다 들어섰던 서구의 교회들은 모두 텅 비어 있고, 백발의 노인들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슈퍼마켓이나 주점에 자리를 빌려 준 교회들도 있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교회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슬람 지역은 물론이고 모든 아시아 지역에도 교회는 찾기 어렵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그러다가 한국의 공항에 내려 거리를 달려보면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진다. 동네마다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고, 비로소 안전한 나라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한국의 교회도 그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기는 하나 그래도 한국에는 아직 ‘인자의 복음’이 살아 있음을 절감할 수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 3만 명의 선교사를 보내 놓고 있는 ‘선교대국’이고 많은 오지에서 한국의 봉사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짐승의 시대로 들어선 것처럼 세계의 모든 강대국들도 마침내 자기중심(Me-centric)의 동물적 본능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 시대에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한반도를 주목하도록 하셨다.
백두산의 뿌리를 뒤흔드는 북한의 잇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이 세계의 G2에 오른 미국과 중국을 대립하게 만들고, 협박과 폭언을 쏟아내고 있다.

세계가 보고 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한 대목을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모두 그분을 주목하여 보았다. 마치 그 때처럼 오늘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전 세계가 한국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다. 한국에 가려는 사람을 보면 붙들고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려느냐”고 묻는다. 여러 강대국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국민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유치해 놓은 한국은 그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공들여 준비하고 있다. 과연 하나님은 한반도에서 무엇을 보여 주시려는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
이 대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나무가 소생하는 때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생각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토로 돌아가 나라를 세운 1948년을 그 때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삼아 많은 이단들이 심판의 날을 자기 생각대로 점쳐서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 보았던 그 1948년으로부터 40년 후인 1988년에 세계는 한국의 서울에서 LA 올림픽을 보이콧 했던 동구권까지 모두 참가해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와 함께 치러지는 올림픽 대회를 보았다. 그리고 그 개막식 장면에서 깊은 적막 속에 굴렁쇠를 굴리며 들어오는 한 소년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한국이 아닌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다시 30년을 더한 2018년에 한국의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회복된 해이고 해방된 한국의 정부가 수립된 해이기도 한 1948년 이후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2018년에 하나님은 이 한반도에 전 세계의 시선을 모아 놓고 무엇을 보여 주시려는가? 전쟁인가, 심판인가? 아니면 우리가 70년 넘도록 부르짖어 기도해 온 통일인가?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겔37:22).
하나님이 한반도에서 보여 주시려는 말씀과 뜻은 무엇일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 4:2).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실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물으셨다.
“지팡이니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지팡이는 이제 더 이상 양치기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권세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였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 4:20).
그동안 잠시의 성공에 취해 있던 한국은 이제 그 배부름과 풍요의 미몽에서 벗어나 다시 광야에 서야 한다. 우리가 잿더미에서 일어나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말씀의광야’에서 새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조상 때로부터 전해 내려온 ‘경천애인’의 정신으로 살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전한 가장 큰 계명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우리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엄히 명한 또 하나의 당부는 자신의 유익보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라는 ‘홍익인간’의 교훈이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우리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과 목숨과 뜻을 이 일에 걸어야 한다. 한국은 아직도 세계 최고의 청년 자원을 가지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세계 130개 나라의 인적자본 활용 능력을 평가한 ‘2017 글로벌 인적자본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5~24세의 문해 능력과 산술능력은 세계 1위에 올랐다.”(2017.10.8. 조선일보)
이렇게 우수한 인적 자원이 ‘자기중심(Me-centric)’의 벽에 갇혀서 이들의 노동 참여율은 최하위권인 120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변칙적인 병역면제를 남발할 것이 아니라 해외파견자의 병역을 면제해 주는 등 인센티브를 주어 이들이 ‘홍익인간’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벽을 넘어서’ 세계를 위해 일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야 한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그분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김성일 (소설가)

196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 대우중공업 이사를 지냈다. 기독교 소설과 추리, 역사소설을 주로 쓴 기독교문학가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성경과의 만남>, <성 경으로 여는 세계사 1, 2, 3>, <하나 되게 하소서>, <문화전쟁의 시대>, <제3일의 소 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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