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은 거짓 신들의 전쟁터

우리는 무엇을 숭배하는가?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랑하며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흐르는 사랑과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에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길 소망하며 축복한다.


예전에는 우상숭배라 하면 사찰에 가서 신상을 세워두고 절하는 것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간편하게 스마트 폰을 통해 우상을 세워두고 마음을 다해 탐닉한다. 사람들은 잠시 주님을 묵상할 여유도 없이 틈만 나면 사진과 영상을 들여다보거나 게임에 몰입한다. 우리가 마음과 몸을 다해 섬기고 안식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다. 매일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보좌에는 누가 앉아 있을까? 그 자리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앉아 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숭배한다. 모두가 자기만족을 위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탐닉하고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전통적인 중독인자는 음주와 흡연이었다.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을 때 그 분노와 고통을 술과 담배로 마취하고 위로하면서라도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아이돌, 자동차, 명품, 음식, 돈, 부동산 등의 이 시대의 새로운 중독
인자들을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라도 시청하는 것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우상숭배이다. 자신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을 때 미디어를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대리만족 할 수 있는 시대이다.

젊은이들이 하는 인터넷 매체 중에 ‘SNS’라는 서비스가 있다. 일상의 사진이나 글을 올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서비스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하는 좋은 취지와 다르게 SNS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진과 글이 난무한다. 더 나아가 수없이 쏟아지는 다른 사람들의 글과 사진을 보며 자기와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진다. 예전에는 유명 연예인이나 가질 법한 깊은 우월감과 열등감을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각각 느끼며 우리네 삶은 하루하루 병들어 간다. 자기숭배의 우상숭배가 가득한 시대의 풍경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숭배에 대한 면역력을 이미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이미 자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의 말씀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장례식까지 마친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일을 확신하는가?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에 근거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처참한 고난에 대한 묘사와 상징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 “나의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형틀이었고, 동시에 나의 사형 틀이었다.
교회는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을 동의하고 믿는 이들의 모임이다. 원수는 교회를 향해 거짓을 말한다. “너의 자아는 여전히 살아있고, 쾌락을 요구하고 있어”라고 속이는 것이다. 세상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도 원수의 거짓말을 돕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자기에게 쾌락을 선물하고 자기숭배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한 가운데 걸려있는 십자가는 인테리어가 아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교회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십자가는 더 이상 나는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아니, 내 자아는 죽지 않았어요. 여전히 난 살아있어서, 나를 죄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다. 누구나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 6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이후에 로마서 7장에서 다시 죄에 눌려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그때 바울 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한다.

무엇을 지고 갈 것인가


혹시 성경본문의 ‘사망의 몸’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로마의 참혹한 형벌 중에 죄인을 시체와 함께 묶어 던져두는 형벌이 있었다. 시체가 부패하며 나타나는 각종 바이러스와 독극물의 영향으로 서서히 죄인이 죽어가는 처참한 형벌이다. 바울 사도는 이 형벌을 보며 마치 우리가 이와 같은 형편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미 사망한 자신의 시체에 묶여서 살아가는 삶을 탄식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사망의 몸’ 곧 시체가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끼는가?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시체’라는 진리이다.

매일 아침 나는 선택 앞에 선다. 시체 ‘남유다’와 ‘십자가’ 중에서 무엇을 메고 하루를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만일 시체 ‘남유다’를 메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시체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고급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멋진 차를 타도록 애쓸 것이다. 자기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메고 다니는 시체 ‘남유다’를 칭찬하고 심지어 찬양한다.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고통이 시작된다. 시체에서 부패한 진물이 흐르듯이 시체 ‘남유다’에게서 사망에 속한 감정 이를 테면 열등감과 질투와 같은 것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금세 마음에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고통을 잊고자 시체가 요구하는 각종 인터넷 오락, 음주, 흡연 등의 무엇이라도 해보지만 해결되지 않는다. 시체를 메고 사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시체를 벗어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길 단호하게 명령 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에 눌려 한탄하던 바울 사도 역시 그 시체를 벗어 버리고 십자가를 메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자유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바울 사도와 같은 놀라운 삶을 살 수 있다. 더 이상 이미 죽어 시체가 되어버린 자신을 우상화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의 몸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예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속한 감정들인 열등감과 중독과 질투와 더러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난과 저주 등의 현실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사망의 몸’을 메지 않고 ‘십자가’를 메고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도와 말씀의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직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늘 승리할 수 있다.

나는 37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내 첫차를 가지게 되었다. 나이도 있었고, 아이가 셋이나 되었지만, 주님께서 그때까지 아직 차를 주시지 않아서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다섯 가족이 움직일 때에는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버스 여행을 좋아해서 가족 모두 감사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정 강의를 의뢰 받고 한 단체를 방문했다. 하루 종일 진행된 강의 이후에 해당 단체 대표님께서 자동차 구입을 위해 큰돈을 후원해주셨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어 극구 사양했지만, 기도를 통해서 결정하신 문제라고 하시며, 송금해주셨다. 나는 며칠 기도하며 이 재정을 어떻게 할지 주님께 의뢰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보여주셨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선교사였는데, 그도 차가 없었다. 나는 주님께 재정을 반으로 나눠서 작은 차를 두 대 사겠다고 기도했다.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셨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네 마음은 알았으니 돈은 나누지 말고 차는 필요한 정도로 크고 좋은 차를 구입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혹시 내 안의 욕심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며칠 동안 점검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분명했고 모든 과정 안에 평안이 있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9인 승의 넉넉한 차량을 구입하고 하루가 지났는데, 이번에는 지난번 재정 강의를 들은 수강생 중 한 분에게서 다시 ‘차량구입’의 명목으로 재정이 들어왔다. 지난번과 정확히 같은 분량의 재정이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해서 감사하지만 이미 차량은 구입했으니 마음만 받고 재정은 다시 송금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헌금한 분은 그 말씀을 듣고 이미 순종함으로 헌금한 것이니 목사님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사용해달라고 하셨다.

주님을 경외하고 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재정은 언제나 참으로 귀하다. 나는 그 재정들에게서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귀한 재정을 처음 생각난 그 선교사님께 자동차 구입을 위해 드렸다. 그 선교사님은 참으로 기뻐하셨다. 아무것도 없던 우리에게 두 대의 좋은 차가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는 전혀 재정도 없었고, 차량도 없었지만, 다행히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자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있었다.

혹시 만일 그 때 내가 세상의 가치와 기준 안에서 나 자신을 우상화하여 불만족과 원망으로 살고 있었다면, 큰 재정 앞에서 주님을 의뢰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판단과 감정으로 재정을 사용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남유다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채웠을 것이다. 내 인생을 ‘사망의 몸’이 채운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랑하며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흐르는 사랑과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에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길 소망하며 축복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남유다 (목사)

월드미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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