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20회)

북한선교는 영원한 기도제목이다


나는 예전에 포춘지와 인터뷰를 통해 북한문제와 남북통일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되어 남북한이 극한 혼란을 겪는 그런 통일을 원치 않는다. 동독과 서독이 20여 년 동안 자유롭게 왕래를 하면서 의식의 갈등을 풀어나간 것처럼, 우리도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1년 내내 계속하면서 의식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 아울러 개성, 금강산, 평양, 나진 선봉 등을 활짝 열어놓고 교류의 장을 열어야 한다. 이미 일부 북한 사람들은 USB(데이 터 저장매체) 등을 들여와 한국의 인기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이것이 나중 에 남북교류의 좋은 영향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북한에 세 번 가보았다. 황량한 민둥산, 굴뚝의 연기, 생기를 잃어버린 거리…. 그것은 우리가 사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통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경계선을 넘어갈 때마다 통행증과 출입증 체크 등으로 번번이 감시를 당한다. 북한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포춘지 인터뷰에서 ‘대화와 점진 적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강조했다. 왜 북한에 그리 깊은 관심을 갖는가. 북한은 나의 조부가 신앙을 받아들여 자손들을 신앙으로 훈련시킨 축복의 땅이다. 이 땅에서 성령운동이 처음 일어난 복음의 땅이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를 남의 일처럼 여길 수가 없다. 북한 선교는 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없다”


할아버지가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신앙이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최고의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사위나 며느리가 될 사람은 무조건 신앙이 좋아야 했다. 9남매를 모두 이런 정신으로 키웠다.
자녀들의 결혼 조건은 아주 단순했다. 무슨 특별한 것을 원치 않으셨다.
“우리 가족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 것은 신앙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내 사위나 며느리가 될 수 없다. 학벌이나 재산은 중요하지 않다.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결혼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 남자 신자가 많지 않았다. 교회 내에 좋은 예비신부는 많은데, 좋은 예비신랑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고모들이 신랑감을 교회에서 찾지 못하고 자연히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둘째 고모는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있었다. 연대 수학과 같은 반 동기인데 불신자였다. 고모의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조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결혼 대상자에서 배제되었다. 그분은 비록 고모와 결혼을 하지는 못했으나 교육부 장학관이 되어 고모가 어려워 도움을 청하면 묵묵히 도와주었다. 수학선생으로 재직하던 고모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 학교를 옮길 때 어려움이 없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어느 날 신랑감을 찾지 못해 고생하고 있던 때 한 신사가 교회에 지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60년대에 지프차는 권력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고모부가 늘 경무대(현 청와대)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식구들은 그가 경무대에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다. 고모부 친구 중 사기성이 농후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꾸민 일이었다. 당시 경복궁 경회루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고모부는 경무대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지프차의 주인도 아니었다. 경회루 결혼식 비용도 다 빚내서 한 것이어서 그것을 갚느라 고생해야 했다. 그날부터 고모의 눈물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모부가 오래 집을 나가 있는 동안 고모 혼자서 자녀들을 키우느라고 여간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고모의 눈물의 기도의 열매로 오랜 방황 끝에 고모부가 돌아왔고, 함께 미국에 건너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교회 장로가 되었고 교회 충성 봉사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막내 고모도 연세대학교에 다녔는데 동문과 교제하면서 동일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둘째 고모에게 상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언니, 내가 사귀는 사람도 신앙이 없어요. 아버지가 알면 분명히 결혼을 반대 할 거예요. 언니한테 한 번 속은 후로 는 더욱 철저하게 검증하실 태세입니다.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데….”
그래서 고모부와 작전을 짰다. 눈 도장을 찍기로 한 것이다. 막내 고모부는 결혼하기 전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할아버지께 인사 드렸다.
“아버님, 오늘도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조부는 이에 깜빡 속아 결혼을 허락했다.
고모 부부는 결혼 후 얼마 있지 않아 캐나다 오타와로 이민을 가서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곳에서 한인회 회장도 지내고 신앙도 갖게 되어 교회 장로로서 교회와 교민사회를 위해 크게 활동하셨다. 그런데 결혼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번은 고모 부부가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가족사진을 동봉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고모부가 담배를 들고 있었다. 조부가 크게 분노 했다.
“연 서방(작은 고모부)이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하고 있구나. 나를 속였구나. 예수를 엉터리로 믿고 있었구나.”
고모 부부는 그 일을 수습하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물론 나중에는 모두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복음 사역에 헌신했다.
모두 이런 갈등과 역경을 거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5명의 딸은 모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네 분은 권사, 한 분은 목사 사모가 되었다. 조부의 가르침과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는 이런 고집스러운 할아버지를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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