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교회는 기도로 짓는다(17회)

조부는 1950년 초 제주도로 건너가셔서 제주도에서 고모들과 함께 2년 6개월 동안 사역했다. 같은 시기에 작은 아버지(이경준 목사)는 서귀포교회를 복원하고 목회했다. 그리고 피란민들이 밀집된 부산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조부는 한경직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 북한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현봉 목사님을 모시고 부산 영락교회 설립을 도왔다. 교회가 완공됐을 때, 조부는 큰아버지 부부를 조용히 불렀다.
“이제 내 일은 거의 끝났다. 나는 서울로 올라간다. 그 대신 너희 부부는 평생 부산에 남아서 교회와 목사님을 잘 섬기거라.”
“예, 아버님.”
큰아버지는 이경화 장로님이다. 큰어머니는 방복심 권사님이다. 방복심 권사님은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인 방지일 목사님의 고모가 되는 분이다. 두 분은 어떻게 결혼 하게 됐을까. 당시 평양에는 두 개의 큰 교회가 있었다. 서문밖교회와 장대현교회였다. 당시 양쪽 교회 교인수가 각각 1천명이 훨씬 넘었다. 큰아버지는 서문밖교회 청년 부회장이었고, 교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며 충성했다. 그 청년을 유심히 지켜보던 장대현교회 방지일 목사님이 두 사람을 연결해준 것이다. 방복심 권사님은 부산영락 교회를 증축 확장할 때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 교회 본당에서 밤을 보냈다.

“교회를 증축하는데 편안하게 이불 덮고 집에서 자는 것은 옳지 않다.”
담요 하나를 들고 밤마다 교회로 향했다. 1년 반을 딱딱한 의자에서 눈물의 기도로 지새운 믿음의 용사였다. 큰어머니는 아예 새벽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라도 할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다. 교회증축이 완공될 때까지 기도로 교회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기도와 눈물로 짓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평생 부산영락교회 수석장로로 교회를 섬기시다 천국에 가셨다. 큰 아버지도, 큰어머니도 모두 참으로 훌륭하신 신앙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조부 이원 근 장로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힘이다. 나는 이런 가문에서 자란 것을 큰 복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런 전통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한다.

교회를 떠난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조부 이원근 장로님은 가족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전통’을 물려주었다. 큰아버지 부부가 부산영락교회를 증축할 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시간’과 ‘정성’과 ‘기도’를 심는 모습을 보면서 큰 깨우침을 받았다. 내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다.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가문의 신앙전통이 되었다. 교회를 떠난 신앙생활, 교회에 반하는 신앙생활, 교회와 주일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위험한 것임을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교회와 신앙을 떠난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교회 밖에서 은혜를 사모하다가 엉뚱한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생활을 너무 잘 하려다 잘못된 길로 접어든 사람은 신비주의에 빠 지거나, 자기의 의로움에 사로잡혀 교회에 어려움을 가져온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교회관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이원근 장로님의 이런 가르침이 후손들에게 소중한 신앙의 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분은 내 신앙의 교과서였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항상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나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독실한 믿음을 가진 부모님의 교육 밑에서 자란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과 부모님을 통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배운 것에 감사한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여성지가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말 다섯 가지를 발표한 적이 있다.
“내가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 너는 왜 다른 아이들처럼 잘하지 못하니? 이 바보야. 네가 도대체 나이가 몇이니? 제발 엄마를 괴롭히지 마라.”
이 다섯 가지의 부정적인 말이 자녀의 인생을 암흑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 좋은 신앙의 전통을 가진 가정은 좋은 언어와 행실로 삶의 본을 보여야 한다. 내가 숱한 사람들의 모함과 공격에 대해 끝까지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조부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신앙의 힘 때문이다.

미국 유학의 길을 포기하다


할아버지는 효심이 지극했다. 부모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했다. 평양에서 신앙생 활을 하던 중, 미국인 선교사가 할아버지와 김양선이라는 청년을 조용히 불렀다. 선교사는 평양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두 젊은이를 부른 것이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조선에 인재를 키우도록 꽤 많은 장학금을 준다고 한다. 너희 두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기에 충분한 돈이다. 아주 좋은 기회다. 유학을 떠 날 준비를 하라.”
김양선은 이 사실을 즉각 부모에게 알렸다.
“미국 유학을 떠나겠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의 부모는 유학을 반대했다.
“절대 안 된다. 한 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포기하거라.”
그러나 김양선은 부모의 반대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나중에 의사가 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할아버지도 증조모님께 미국 유학의 뜻을 전했다.
“어머니, 제가 미국에 유학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가능하면 미국에 가서 선진 학문을 배워오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증조모는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말렸다.
“너는 우리 가정의 9대 독자다. 자손이 귀한 집이다. 네가 40일 동안 배를 타고 미국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고통이다. 그리고 미국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도 없다. 너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 절대 안 된 다. 함께 살아야 한다.”
증조모는 9대 독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염려와 걱정에 강하게 반대하시며 슬피 우셨다. 결국 그 눈물을 거역하고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효자였다. 도저히 모친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포기한 대신 무역업을 통해 많은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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