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믿음의 뿌리를 이어가라(11회)

2017년. 이제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출발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넓은 운동장에서 항상 내게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울려준 분이 조용기 목사님이다.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던 해가 1973년이었다. 그해 7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새 성전을 완공하여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 목양과 세계선교로 분주하신 조 목사님이 한낱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구체적인 진로상담을 해주신 것은 아주 특별하고 파격적인 사랑이었다.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했을까.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그 배경을 좀 설명하고자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였다. 조부는 제주도에서 2년 반 교회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부산에 오셔서 한경직 목사님을 도와 부산 영락교회를 세는 일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6·25전쟁 끝난 후 서울로 올라오셔서 상도동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집에서 가까운 상도교회에 출석했다. 부모님과 우리 가족은 장충동에 살면서 충현교회에 출석했다.

1964년 초 서대문으로 이사를 오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드시면서 다리가 불편하셨다. 집에서 새문안교회까지는 걸어서 40분 이상 걸렸다. 순복음교회는 도보로 5분 거리였다. 더구나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님은 할아버지가 서문밖교회 장로로 섬기실 때 교육 전도사로 사역한분이다. 두 분은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 가족은 새문안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소중히 여기신 조부가 다리가 불편하신 관계로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순복음교회를 선택하셨다. 할아버지는 3개월간 새벽기도에 참석하시던 중 큰 은혜를 받으시고 남은 여생 신앙생활 하실 교회로 선정하신 것이다.

할아버지의 교회 선택은 우리 온 가족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 가족은 충현교회를 떠나 조부와 함께 순복음교회에 정착했다.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님과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께는 참으로 죄송한 일이었다. 충현교회에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정홍원 전도사님도 순복음교회로 옮겨와 모든 예배에서 올갠 반주를 맡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예배에 하나도 빠짐없이 올갠 반주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외에도 충현교회 몇몇 신자들이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받고 우리와 함께 순복음교회에 정착했다.

교회를 옮긴다고 하자 어느 날 김창인 목사님은 부모님을 부르셔서 “할아버지 다리가 불편하셔서 가까운 교회로 나가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이면 순복음교회입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 한국 교계에서는 다소 생소했다. 또한 성령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나중에 한국 교계의 이해가 있었다.

나는‘소년 목사’로 불렸다
1966년 2월, 나는 성령체험을 했다. 그때는 정말 두려움이 없었다. 만나는 모든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전도했다. 매일 학교 갔다 오다가 교회에 들러 1시간 이상씩 기도했다. 그 당시 학교에서 나의 별명은 ‘목사’였다. 요즘 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네가 목사가 될 줄 알았어. 그때부터 알아봤어.”고등학교 1학년 때는 반장이 되었는데 매일 다른 친구들보다 1시간 먼저 등교했다. 그리고 우리 반 학생 70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가면서 모두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같은 반 친구 중 한 사람이 새누리당 의원인 홍문종 장로다. 그는 원래 믿음이 좋은 교육가 집안의 자녀였다. 지금도 정치인과 목회자로서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 당시 나의 짝은 서경원이었다. 얼굴이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소년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끊임없이 전도를 했다.

“경원아, 너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나랑 함께 교회에 나가자.”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답했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에 참석하는 것도 지겹다. 그런데 일요일에 교회에 가자고? 일요일에는 여학생이나 만나러 가야하니 너나 잘 믿어라.”
도무지 전도가 먹혀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났을 때였다. 내가 미국LA의 나성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청빙되어 갔을 때였다. 신문에 그 기사가 났었는데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영훈 목사님이 혹시 대광고등학교를 나온 이영훈 목사님인가요?”
전화가 연결되어 약속시간을 잡고 그 친구를 참 오랜만에 식당에서 만났다.
“친구야 반갑다. 나는 너의 고등학교 시절 짝이었던 서경원이야. 네가 분명히 목사가 될 줄 알았어.”그는 감리교회의 안수집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에 일찍 이민을 와서 크리스천이 되었다. 단기선교도 일곱 번이나 다녀온 신실한 신자가 되어 있었다. 교회를 다니면서 그때 나를 전도한 영훈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늘 생각했다고 한다. 아,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라웠다. 35년 전 파종한 전도의 씨앗이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가
사람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의 알래스카는 ‘3금(金)의 보고(寶庫)’로 불린다. 알래스카는 검은 보물인 석유와 푸른 보물인 삼림과 누런 보물인 황금을 품고 있는 보석 같은 땅이다. 미국은 이 땅을 제정 러시아로부터 7백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미국은 한국의 일곱 배나 되는 넓은 땅을 서울 명동의 땅 1백 평 값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사들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 국회는 매매계약을 성사시킨 소워드 국무장관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왜 쓸모없는 얼음땅을 7백20만 달러나 주고 샀는가. 국고를 탕진한 책임을 져라.”지금 알래스카는 1천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된 ‘자원의 보고’로 불린다. 어디 그뿐인가. 뉴욕의 맨해튼 섬은 한 네덜란드인이 어느 인디언으로부터 4달러에 매입했다. 그것도 현금이 아닌 4달러짜리 양주 한 병이었다. 그 인디언이 오늘의 뉴욕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 주위에는 어리석은 인생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혼을 내주고 환락을 사는 현대인들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도록 기도해야 한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가.믿음의 뿌리를 견고하게 이어가는 것이 참 축복이다. 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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