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후손들(3회)

1930년대의 평양 서문밖교회의 모습(

조부 이원근 장로님은 평양에서 미싱 무역상을 했다. 싱거미싱 외판원으로 시작하여 일본 굴지의 오우므라미싱 총대리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미싱 조립 공장을 세워 미싱을 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 보급했다. 조부의 사업은 크게 번창하였고, 마침내 조부는 평양시 미싱상 조합이사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조부가 다니던 서문밖교회의 후배 장로로 조부의 회사에서 모든 물품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던 직원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강양욱이다. 그때 그의 아들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 그 중학생 소년이 나중에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이 된 강영섭이다. 김일성의 신앙적 가계(家系)를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복음의 명가를 이루게 하소서
김일성은 김형직과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다. 특히 어머니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믿음의 여인이었다. 김일성의 외조부는 강돈욱으로, 강양욱은 그의 육촌 동생이다. 강돈욱은 만경대 일대
에서 주민들에게 크게 신임을 받던 유지였다. 그는 성경을 잘 가르치던 교육자였다.

강양욱은 194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부주석의 자리에 올라 북한 서열 제2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주석의 자리에 있었고, 김일성 주석이 매년 생일 때 찾아 예를 표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강영섭은 러시아 레닌그라드종합대학교와 평양신학원을 졸업하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2007년 조용기 목사님이 북한에 심장병원을 건립할 때 카운트 파트가 되어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 강영섭은
2012년 1월 21일 사망했고 지금은 그의 아들 강명철이 북한 서열 제13위로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일성은 어렸을 때 평양 칠골교회에 다녔다. 장기려 박사가 김일성의 목뒷부분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 김일성은 장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러면 왜 김일성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까. 김일성 회고록에 보면 그 대답이 나온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지금 일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서는 도무지 그 희망과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

김일성이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과 참된 용기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끔 이원근 장로님과 강양욱의 삶을 비교해본다. 두 사람의 인생이 확연하게 갈린다. 한 사람의 후손은 모두 기독교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명가를 이루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후손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민족의 아픔을 심화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른다.

아이젠하워와 히틀러
1889년, 1890년.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두 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사촌지간 근친혼인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1889년에 태어났다. 소년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 밑에서 온갖 학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마음속은 온통 분노와 증오로 들끓었다. 그는 열여섯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극렬분자가 되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이다.

그 다음해에 또 다른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마음속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으로 충만했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을 막아낸 평화주의자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서로 맞닥뜨렸다. 한 사람은 파괴와 분노의 독기를 뿜어냈고, 한 사람은 평화를 외쳤다. 그 삶의 결과는 어떤가. 히틀러가 쉰여섯에 자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아이젠하워가 죽었을 때는 세계인들이 애도했다. 무엇이 두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확연하게 갈라놓았는가. 신앙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다.

“형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부 이원근 장로님께도 위기가 닥쳐왔다.
기독교인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은 민중에 의해 타도당할 분위기였다. 당시 김일성 주석 밑에서 서기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강양욱이었다. 그가 할아버지를 찾아와 말했다.

“형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기 머무르시려면 공산당에 협조해야만 합니다. 제가 그동안 함께 지내며 형님의 곧은 성품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형님은 대쪽같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공산당에 협조하실 리가 없
습니다. 제가 그동안 형님께 많은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보답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강양욱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할아버지 밑에서 일할 때의 싹싹하고 유능한 후배 장로의 모습이 아니었다.

“형님! 가족들을 데리고 속히 월남하십시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월남하세요. 그 대신 남쪽에 가시면 절대로 공직을 맡지 마십시오. 곧 통일이 됩니다.
우리가 곧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그때 책잡히지 않도록 조용히 숨어서 지내십시오.”

북쪽에서는 이미 남침할 준비를 모두 끝내놓고 있었다.
1948년 6월.
조부 이원근 장로님의 가족들은 각기 평상시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서 흩어져 열차와 자동차를 타고 그날 저녁 황해도 해주 항구에 모였다. 가족들은 입던 옷에 가방만 하나씩 챙겨들고 나왔다. 조부의 가방엔 성경책과 주석책 몇 권이 담겨 있었다. 만약 공산당에 발각되면 처형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재산과 귀중품을 고스란히 평양 집에 놓고 몸만 빠져나왔던 것이다. 조부가 월남하기 위해 통통배 하나를 빌렸는데 가족들은 배 맨 밑바닥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 위에 생선 궤짝을 실어 은폐했다.†

이영훈 담임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