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하나님께 좋은 것을 먼저 드려라(2회)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모습(좌측 두 번째가 이영훈 목사)

2016년 3월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3·1절 제9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남북한이 첨예한 갈등과 팽팽한 긴장으로 맞선 상황이었다. 더구나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은 내외부의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날 기념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에도 긴장이 엿보였다.

목사인 내가 왜 그 자리에 참석했는가. 이날은 내게 참으로 뜻 깊은 기회였다. 9대 독자로서 예수를 잘 믿었던 조부 이원근 장로님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가족이 상을 받는 자리였다. 조부는 독립운동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서신 분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조부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 감사드린다.

독립유공자 포상, 조부 이원근 장로
1919년 3월. 조부는 황해도 장연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일제의 신사참배와 한일합방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애국자였다. 조부는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조부는 질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분이다. 비느하스처럼 의로운 분노를 발할 줄 아는 신앙의 용사였다.

해방 후에도 교회를 향한 실천적 사랑은 계속되었다. 제주에서 1948년 발생한 이른바 4·3사태는 복음전파에 치명적 악재로 작용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 내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해 경찰과 민간인이 다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전체가 혼돈의 늪 속에 빠져들었다. 그 때 조부는 제주도에서 왕성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4·3사태로 인해 제주도의 많은 교회들이 소실되었을 때, 미 남장로교회 파송으로 광주에서 크게 선
교활동을 하고 있던 타요한 선교사가 조부를 만나 부탁했다. “장로님께서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셔서 무너
진 교회들을 다시 재건해 주십시오”조부는 타 선교사의 부탁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교회재건을 위해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표선과 남원교회를 재건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무장 세력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조부는 남원교회에서 2년 반 동안 사역을 하면서 위미에 기도처를 세웠는데 나중에 위미교회가 되었다. 또 제주 남원중학교를 인수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교육에도 앞장섰다. 조부의 이런 활동을 늦게나마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3·1운동, 항일운동, 의병활동에 참여한 65명의 독립 유공자를 포상했다. 그 중 한 분이 나의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다.

“복을 받고 싶으냐?”
나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한국교회는 구한말 개화기에 이 나라의 정치·경제·교육·의료·문화·사회 등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교회의 역할과 기여에 비해 평가는 절하되었다. 이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가 올바른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내가 우리 가문의 신앙 스토리를 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을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신앙 안에 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쳤던 선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중한 교훈을 얻고 싶은 것이다. 우리 가문은 조부로부터 가장 큰 신앙적 영향을 받았다. 지금도 할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다.

“복을 받고 싶으냐? 그러면 교회를 잘 섬기고, 주의 종의 뜻을 잘 받들어 모셔라. 복 받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주일성수’다. 그리고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주일성수는 조금도 타협이 없었다. 주일에는 음식을 사먹지도 못했다. 그 흔한 만화책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모든 열정과 시간을 바쳐야 했다. 그것이 조부의 가르침이었다. 조부 슬하의 9남매와 후손들은 모두 예수를 잘 믿고 있다. 그 후손이 총 135명이다. 그런데 이 중 목사가 13명이다. 나는 이것을 ‘목사 십일조’라고 부른다. 나머지 가족은 장로, 권사, 집사, 목사 사모로 각각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과의 인연
내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화폐개혁이 있기 전이었다. 주일이면 할아버지에게 연봇돈을 받았다. 은이 20퍼센트 정도 첨가된 도톰한 100환짜리 은화였다. 동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주일마다 100환짜리 동전을 쥐어주었다.

“이 돈을 연봇돈으로 드려라. 항상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한다.”
100환은 제법 큰 액수다. 평소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었다. 그 돈이면 맛있는 음식을 실컷 사먹을 수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후손들이 어려서부터 크고 좋은 것을 주저 없이 헌금하도록 철저히 교육시켰다.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 나는 평생동안 이런 다짐을 하며 목회를 해오고 있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먼저 바친다.”
당시 평양에는 장대현교회와 서문밖교회가 있었다. 조부는 서문밖교회의 장로였다. 조부는 당시 재봉틀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재봉틀을 수입해 평양을 비롯해 전국으로 보급했다. 여기에서 깜짝 놀랄 사실이 하나 있다. 아마 이것은 한국교회사를 바로 쓰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조부의 서문밖교회 후배 장로로 조부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회계를 담당했던 사람이 강양욱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이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다. 그 소년은 당시 중학생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강영섭.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지낸 사람의 이름이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외조부 강돈욱의 6촌 동생이다.†

이영훈 담임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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