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기도원’에서 드린 감격의 예배(정두언 집사/전 19대 국회의원)

세상의 밑바닥으로

2013년 1월 24일. 그 해 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다. 저축은행 비리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온 내가 징역 1년의 실형 선고를 받고 법정 구속된 날이다.

7월부터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국회에서 여야를 떠나압도적인 표차(197:74)로 체포동의안이 부결 되어, 불구속 재판을 받아오던 터였다.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아내와 딸은 해외출장 중이었고, 아들은 군 복무중이라 가족 하나 없이 나 혼자 덜렁 재판정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서초동 법원에서 의왕에 있는 서울 구치소까지 이동하는 몇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된 채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이미 끊은 지 십 년 가까이 된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구치소에 도착하여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촬영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신입방으로 배정이 되어 소위 감방으로 들어가자 낯설디낯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들로 나를 맞아 주었다. 세상에서 처음 본 동료들의 배려로 가장 따뜻한 자리에 누웠지만, 나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자다 깨다 하며 온 밤을 선잠으로 설쳤다.

열 달이란 특별한 시간
그러기를 사흘 밤. 주일날이 되었다. 일요일은 면회도 없고 운동도 없고해서 하루 종일 방에만 있는 날이다. 나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내가 수감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교회에 갔었을 텐데.

문득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을 가져다 그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기억을 더듬으며 예배 순서를 만들었다. “혹시 예배 같이 드릴 사람 있어요?” 다행히 내가 나이도 제일 많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서인지 네 명의 동료들이 선선히 예배에 동참했다. 예배를 드리고 나니 한결 살 것 같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앞날을 그려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언제 나갈지 모른다. 있는 동안 뭐를 해야 하나. 이곳에서의 시간이 죽은 시간이 되지 않으려면? 이곳을 기도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평소에 늘 소원하던 일이 진정한 신앙심을 가져보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흔들림이 없는 신앙심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열 달 동안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삼시 세끼 꼬박 예배를 드렸다.
매 끼니 때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평균 10장씩 읽었다. 국립기도원에서 나올 때쯤 되니 성경을 2독 이상 하게 되었다. 세상에, 내가 성경 통독을 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교회 다닌다는 사람 중에 성경 통독을 한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단 나는 감옥 생활을 통해 비로소 성경 통독이라는 크리스천의 기본 숙제를 마칠 수 있는 행운(?)을 잡은 셈이다. 성경도 그냥 읽은 게 아니라 소리 내어 읽다보니 지루하지도 않고, 성경에 운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배 때 제일 문제가 찬양이었다. 레퍼토리가 한정되다 보니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이미 부른 노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는 교회 열심히 다니는 교도관과 동행할 일이 있으면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졸라서 새 레퍼토리를 얻기도 했다.

원래 기도가 제일 어려운 대목이었으나, 자꾸 하다 보니 자연스레 늘었다. 예전에는 예배 모임 중에 갑자기 기도하라고 할까봐 늘 조마조마했는데,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 의뢰를 받아도 그리 놀라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성경 공부는 독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상 이런 저런 신앙서적을 탐독했다.

그중에 신 아무개 차관이 보내준 찰스 콜슨 목사의 책들이 무척 재미있고도 유익했다. 닉슨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와중에 감옥살이를 하며 회심을 한 그의 경력이 나와 매우 흡사해 더 관심이 끌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너무 글을 잘 써서,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잘 쓸 수 있을까 하고 늘부러웠다.

처음 4개월 동안 두 팔도 채 벌리지 못하는 독방을 같이 쓰며 용맹정진에 동참해준 김 조합장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고 늘 조용한 사동에서 하루세 번 이상 울려 퍼지는 찬양 소리를 묵묵히 참아준 ‘감방 동기들’에게도 뒤늦게 사과를 드린다.

신입방에 있을 때 함께 예배를 드렸던 감방 동기 중의 한 명인 정 회장은 그때의 예배를 계기로 독실한 믿음을 갖게 되어 지금은 거의 장로님 수준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원래 사업을 하며 세상적으로 매우 경건치 못한 삶을 살았던 그는 만기 출소하면 머잖아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을까 싶다. 나와 독방에서 함께 지낸 김 조합장도 원래 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온종일 성경을 보며 지냈다. 그는 안경이 없으면 신문을 보지 못하는데, 성경책은 안경 없이도 볼 수 있다 며 신기해했다.

나중에 병동에 내려와 함께 지낸 정 처장과 김 부장도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통독하게 되었다. 살다보니 내가 예배를 다 인도하게 되고, 더구나 다른 사람을 전도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수감생활을 하며 특히 고마운 게 있었다. 그곳에서 단 한 번도 술 생각이 나지 않았고, 성적욕구가 별로 생기지 않았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술 생각이 나면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고, 성적욕구가 생기면 참으로 비참했을 것이며, 눈물을 흘렸으면 참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꾸준히 예배 생활을 한 덕이 아니었나 싶다.


정두언 (서울홍성교회 안수집사/방송인/전 국회의원/)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