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등불이 된 진리의 복음

한글1--한글이 기독교를 만나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다

복음과 한글의 만남은 우리나라에서 우리 고유의 한글이 귀하게 대접받게 되는 복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이자 신분차별을 넘어서고 남녀평등이 구현되어 인권이 신장되는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위해 예비해 두신 일반은총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만주에서 한글과 복음의 만남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을 기념하는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사상을 가지고 한글을 창제하면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한글을 창제했다. 그러나 이렇게 창제된 한글이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중화사상에 물든 양반들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한글은 반쪽자리 글이라는 의미에서 ‘반절’, 여성이나 사용하는 글이라는 의미에서 ‘암클’이라고 불리며 거의 사용되지도 못했고 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창제한 이 우수한 한글이 복음전파의 도구이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사랑의 도구가 되었다. 한글은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를 통해 복음과 만나게 되었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 파견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는 만주족을 위해 파견된 선교사였지만, 조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만주에서 만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조선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던 로스가 주목한 것이 한글이었다. 그는 1876년에 고려문을 방문한 후에 평안도 출신으로 만주에 와서 장사를 하던 이응준, 백홍준, 서상륜 등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협력을 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만 사용할 것인지, 한글과 한문을 사용할 것인지, 한문만을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로스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하여 순수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하였다.

첫째, 그는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에 한자와 다른 한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글이 표음문자이며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 남녀 누구나 놀랍도록 배우기 쉽다는 사실에 감탄하였다. 이렇게 쉽게 배워서 활용할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인식하면서 로스는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둘째, 로스는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을 알게 되면서 당연히 조선의 모든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한글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한자로 성경을 번역한다면 양반층만 읽을 수 있을 것이요 그것은 아주 제한된 숫자일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조선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요, 그렇다면 그 수단은 당연히 누구나 쉽게 배워서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스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신의 명칭에 대해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천주’가 아니라 조선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하나님’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는 1882년에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여
1887년에는 신약성경을 완역하여 출판한 신약성경전서를 5천부 출판하였다. 이러한 로스의 성경번역본은 대략 5만부 가까이 발행되어 만주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반포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평안도 지방의 놀라운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만주에서 성경번역을 통해 한글이 복음과 연관을 맺으면서 한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독교를 통한 한글의 발전은 국내에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훨씬 더 가속화되었다. 첫 번째는 성경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1887년부터 1910년에 걸쳐 신구약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게 되었다. 만주에서 로스가 성경을 번역하였으나 평안도 사투리로 되어 있어 서울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로스역본의 개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경번역을 시도하였다.

국내에서 성경과 한글의 만남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성경을 번역할 때 이들도 순수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원칙을 세워 실행하였다. 이러한 성경번역 작업은
1887년부터 시작되어 1906년에 이르면 신약성경의 공인본이 나왔고, 1910년에 이르면서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어 1911년에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 성경번역이 시작된 후에 14년 만에 신구약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성경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등의 선교사들과 조선의 김정삼, 이승두 등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경번역 작업은 한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첫째는 한글의 문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글을 별로 사용하지 않아 한글의 문법체계가 크게 발전되어 있지 못했다. 신구약성경의 방대한 성경책을 번역하면서 성경의 다양한 문학 장르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문법체계들의 정립이 이루어졌다. 둘째로 한글성경이 많이 출판되어 보급되면서 한글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17년에 이광수는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라는 글에서 “제5는 언문의 보급이요 언문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심어준 것은 실로 야소교회외다”라고 하였다. 성경번역과 함께 찬송가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찬송가가 사용되면서 그와 함께 서양의 음악도 소개되었다.

셋째로 기독교와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이 순수한 한글로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 서적의 출판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890년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삼문이라 함은 한글, 한문, 영어로 출판한다는 의미였다. 이 삼문출판사를 통하여 다양한 한글서적들이 출판되었다.

장로교에서는 1890년에 중국에서 30년 이상 선교했던 네비우스 선교사의 선교활동 경험을 듣고 선교원칙 열 가지를 정했는데,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 결정이 사회의 상류층보다 근로계급들, 부녀자와 청소년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이를 위해 모든 문서들을 순수한 한글로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성교촬리>, <장원량우상론> 등을 비롯한 다양한 전도문서들이 순수한 한글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게일이 1909년에 번역했던 <천로역정>을 비롯한 다양한 서양의 기독교 작품들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활동과 함께 다양한 서양의 과학적인 기술을 소개하고
한국사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아펜젤러가 1897년 2월에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만들었고, 4월에는 언더우드가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였다. 이러한 신문들도 순수한 한글로 창간되었는데, 교회 소식과 함께 한국사회에 개혁이 필요한 부분들을 사설을 통해서 제시하였다. 부패한 관료제도의 개혁과 남존여비에 대한 비판, 조혼풍습의 문제점, 제사제도의 폐해,
금주금연의 필요성 등 당시 한국사회의 개혁이 필요한 사항들과 함께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와 함께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에게 도움이 될 새로운 농사방법, 어린이 육아법, 서양의 새로운 소식 등을 전하였다.

기독교를 통한 한글 보급과 사회 변화

이렇게 한글은 기독교와 만나면서 다방면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이와 함께 한글 사용의 확산을 가져온 것은 교회의 활발한 전도활동을 위한 사경회 개최와 그에 따른 교회의 급속한 부흥이었다. 네비우스 선교방식의 특징인 자전, 자립, 자치 가운데 특히 자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사경회의 개최였다.

사경회는 성경공부 모임과 함께 찬송가를 배우는 시간과 함께 전도하는
방법, 교회운영에 필요한 회의진행법, 토의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오후에는 직접적으로 나가서 전도를 시행하였고, 전도한 사람들을 저녁에 열리는 부흥회로 인도하여 예수를 믿게 만들었다. 보통 사경회는 2주에서 4주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경회는 당시 평민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수십 내지 수백 명이 모여서 일사분란하게 다양한 내용의 교육을 받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며 전국의 소식을 듣는 것도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이들은 적국 각지로 흩어져 지방 사경회가 열리고 조금 지나면 각 지역 중심으로 다양한 사경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사경회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여기에 부수되는 과정에 한글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글을 가르치는 반이 개설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많은 남녀노소의 그리스도인들이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방식을 통해 전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들에서는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러야 했으므로, 역시 교회에서도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깨우치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독교 선교사들은 전국의 중요한 거점들을 중심으로 미션스쿨들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미션스쿨들은 한글을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기관들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한글을 배우며 한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주시경 선생도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주시경의 영향으로 최현배가 한글연구에 정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글은 기독교와 만나면서 새로운 생명의 물줄기를 만나게 되었다. 한글은 기독교를 만나기 이전에 ‘반절’과 ‘암클’ 등으로 천시를 받았으나, 로스와 국내에 입국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과 만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빛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한글은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조선 사람의 신분차별의 타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경말씀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모두가 죄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신분과 관계없이 구원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조선에서 제일 먼저 백정들이 신분차별을 넘어서게 되었다. 백정이었다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분이 박성춘인데, 이 분은 나중에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서양은 최초의 한국인 의사가 되었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여성들, 집 안에만 갇혀서 지내던 여성들이 복음을 믿고 한글을 배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교회를 나오면서 가정을 벗어나 사회로 진출하게 되었고, 성경을 통해 남녀평등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남녀평등의 첫 번째 실시는 황해도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 상에 앉아 밥을 먹는 일이었다. 유교사회에서는 남편이 먼저 밥을 먹은 후에 아내는 상을 들고 나와 부엌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 시절에 남녀평등을 배운 교회들은 이제 남녀가 같이 한 상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교회에 나와 한글을 배우면서 여성들은 조혼풍습의 문제점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와 직업 활동을 하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복음전파를 위해 전도부인들이 생겨났고, 여성 미션스쿨에는 여자선생님들이,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에서는 여성 의사와 간호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글은 기독교를 만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의 애민사상이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복음과 한글의 만남은 우리나라에서 우리 고유의 한글이 귀하게 대접받게 되는 복된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이자 신분차별을 넘어서고 남녀평등이 구현되어 인권이 신장되는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위해 예비해 두신 일반은총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이은선 (교수)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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