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

영적 갈급함은 예배가 회복될 때 채워진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영적인 갈급함이 식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의 쾌락과 물질의 부유함, 인터넷과 SNS가 영적인 빈곤함을 일으키는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첫 번째 이유는 영적인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영적 만족을 경험한 이는 더 갈망하여 더 갖게 되고, 맛보지 못 한 이는 갈망하지 않아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분들에게 “혹시 오늘 주일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셨습니까?”라고 질문을 드린다면 적지 않은 분들이 “아니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봉사로 섬길지라도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없다면 종교활동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임재하신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주님을 만나고 예배의 감격을 누린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예배 참석은 했지만 그런 만남이 전혀 없고 냉랭하게 돌아간다. 예배 중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배에 참석한 본인만이 답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증언과 같다. 예배 중에 주님과 실제적인 소통이 있었다면 그는 주님을 증언할 것이다.

그 반대로 주님과 어떤 소통도 없었다면 그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진술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예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예배를 준비하고 대하는 마음의 태도에 있다.
목사인 나는 설교를 맡아 예배를 이끌어야 하기에, 항상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동안 주일예배를 준비해왔다. 그 덕분에 주일예배 때마다 다행히 주님을 뵙고 성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렇게 나를 목회자로 불러 은혜를 주심에 감사하다. 만일 여러분도 이와 같이 예배를 기대하고 준비한다면 그 예배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주님께서 성전에만 계신가요?” “우리의 일상에서 예배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주일예배가 무너진 상태에서 일상의 예배는 거의 불가능하다. 주님과 우리와의 100% 만남을 위해 준비된 주일예배와 삶의 현장은 차이가 많이 있다.

주일을 놓치고 일상에서 예배를 회복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매일의 삶에서 시간을 떼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 역시 누구나 기복을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더 다행인 것은 우리가 주일을 통해 잘 준비된 예배시간에 주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리더들은 성도들이 주일만큼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알뜰히 준비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찾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반대로 원수는 우리와 주님의 만남을 필사적으로 방해할 것이다. 원수의 작전이 성공하여 영혼에게 부어질 생수가 차단되었다면, 성도의 영혼은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반면에 원수의 공격은 더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약해진 성도는 오히려 죄에 대한 갈망이 강력해지고 구체화된다. 자연스럽게 그 다음주 주일예배는 더 겉돌게 되고, 심지어 크고 작은 일로 인해 주일성수마저 위태롭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을 단번에 끊어낼 수 있는 것도 역시 주일예배이다. 이때라도 우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수로 영혼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그래서 매주 주일예배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성도들은 예배에 올 때 세상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 세상의 기준과 근심거리 그리고 세상이 쥐어준 거짓말을 들고 다니다 성전에도 그렇게 찾아온다.

진리에 근거한 예배

이를테면, 열등감과 두려움, 미움과 질투, 낙심과 절망, 가난과 저주 등이다.
그런데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감정이 우리 안에 존재함이 분명한 사실이기에 그것들이 우리의 것이라고 속을 때가 많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사실이 곧 진리는 아니다. 한 주간 동안 있었던 우리의 행위는 실제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것에 근거하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의 예배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진리 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예배는 언제나 현실과 진리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가난한데 말씀의 진리는 나를 부요하다고 선언한다. 가난한 현실과 복의 진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나는 행위로 인한 죄인인데, 말씀의 진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의인이라고 선언한다. 죄의 행위와 의인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것이다. 나의 현실과 감정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진리는 말씀이고 예수님이다. 때로는 진리 되신 예수님을 놓치고 세상에서 현실과 감정이라는 사실에 눌려서 끌려다녔지만, 예배를 통해 진리가 다시금 회복되어 내 삶에 빛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 말씀의 진리와 세상의 거짓이 충돌한다. 어느 편에 서는 것으로 예배를 시작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많은 경우 익숙하게 원수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다. 상대는 비열하고 잔혹한 원수이다. 거짓 술수에 능하고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나의 행위와 현재의 감정을 근거로 공략한다. 그래서 원수에게 넘어가 예배 중에 부어지는 생수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큰 손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무색하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랑으로 나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전 존재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예배시간에 성전을 보면 어떤 이들은 맨 뒤쪽에 자리 잡고 앉아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만 묵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같은 자리에서 예배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후회스러운 삶을 돌아보며 갇혀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전자는 감정에 근거한 예배이고 후자는 행위에 근거한 예배이다. 그런 예배는 그런 신앙을 만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신앙과 예배는 십자가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의 예배 중에 주님께서 임재하셨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고, 우리를 향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나눠주실 준비를 마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그분이 준비해두신 감격스러운 선물을 받아서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면 예배가 달라진다.
토요일부터 이미 설렌다. 주일예배가 기대되는 것이다. 마치 바쁜 일상을 살아왔던 연인이 피크닉을 준비하듯 들뜨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일에는 조금 일찍 예배에 도착하게 된다. 가능하면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되고 입술에서는 기도가 시작된다. 아직 우리 안에 남아있는 세상의 거짓말과 헛된 감정을 바닥까지 제거한다. 그것들은 주님과의 만남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진리 가운데 서서 거짓의 영을 대적하면 의외로 원수는 쉽게 꼬리를 감춘다. 그리고 찬양이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일어나서 예배를 누려야 한다. 가장 큰 목소리와 박수로 찬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오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 그렇게 기쁘게 찬양하고 박수치는 것이 우리의 본래 정체성이다. 우리는 주님을 찬송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거짓말에 속아서 낙심하고 슬퍼하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진리에 근거해서 힘이 넘치는 기쁨의 찬양은 예배 후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진리가 더욱 확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이해됨과 상관없이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설교는 주님께서 설교자의 입술로 대언하시는 것이다. 설교는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생명의 떡으로 부어질 때 “아멘”으로 취하는 것이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으로 나를 채우고 새 힘을 공급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모든 예배에 주님이 계신다. 주의 임재하심에 천군과 천사가 성전을 가득 메우고 주님께서 부으시는 선물이 모든 성도들에게 부어진다. 예배 중에 신비한 광경이 성전 가득 채운다.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함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다만 우리의 육체의 눈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예배는 놀랍고 신비로운 영적인 활동이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이들마다 충만한 은혜와 기쁨이 넘친다. 대화 가운데 간증과 찬양이 넘치고 승리를 선포한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위로하고 축복한다. 이것이 예배의 결과이다. 우리의 예배가 풍성하지 않은 이유를 교회나 리더들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그것은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교회를 바꾸지 말고 나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갈망하라

우리는 안타깝게도 영적인 갈망이 식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영적인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영적 만족을 경험한 이는 더 갈망하여 더 갖게 되고, 맛보지 못한 이는 갈망하지 않아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 월드미션교회 초기에 예배처소가 없어서 캠퍼스 동아리 방에서 시작했다, 성전의 위치도 성도들의 집에서 아주 멀었다. 더군다나 예배시간은 아침 9시 30분이었다. 청년들에게는 쉽지 않은 예배시간이었다. 모든 조건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다행히 모두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고, 기쁨으로 예배드렸다.

우리는 매주마다 단순히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했다. 예배는 점점 깊어져 11시 30분에 끝나던 예배가 점점 늘어나더니 심지어 오후 2시까지 진행되었다. 찬양이 길어지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다시 기도하고 찬양하고 다시 떠오르는 말씀이 있어서 다시 설교하게 되어 예배가 점점 길어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깊이 만나주셨다. 우리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교회였다. 하지만 예배 때마다 주님께서 만나주셔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제 우리 교회도 많은 것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예배 때마다 오직 주님을 더 갈망하기를 기도한다. 예전에 주님을 만난 추억에 안주하지 않기를 원하고 오늘 주님을 더 새롭게 알아가기를 소망한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놀랍게도 주님을 더 갈망한다. 반대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은 더욱 주님께 냉랭해진다. 우리에게 이번 주일예배는 주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예배의 깊이를 제한하지 않고, 주님을 갈망한다면 주님은 응답하시고 채우실 것이다. 기회를 붙잡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남유다 (목사)

월드미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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