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게 하소서(이영훈목사님 가문의 신앙 스토리)

주의 종에게 순종하라(8회)

나의 외가는 전통에 빛나는 ‘신앙의 명가’를 이루고 있다. 외할아버지 김종삼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8회 졸업생이다. 황해도 장연 지방의 7개 교회를 맡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역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황해도 장연 출신이신 곽선희 목사님께 외할아버지에 대해 물으니 김종삼 목사님을 잘 기억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친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님은 해방과 함께 장연에 내려와 국가재건위원장을 지냈다. 그것도 역시 김종삼 목사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할아버지는 고향을 지키느라 끝내 월남하지 못했다. 아마 북에서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가는 3대 목회자 가문
김종삼 목사님의 아드님이 김선경 목사다. 나의 외삼촌인 김선경 목사는 서울 북아현교회를 설립했다. 나중에는 제천 두 곳에 교회를 세워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외삼촌의 두 아들도 모두 목사다. 장남은 김성규 목사, 차남이 김선규 목사다. 모두 예장 합동측 목회자다. 김일규 목사는 광명에서 목회를 하다가 은퇴했고, 김성규 목사는 지금 일산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 김일규 목사의 처남이 KBS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예일대 교수 함신익 선생이다. 외가는 이미 3대가 목회자다. 그런데 김성규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머잖아 4‘대 목회자 가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 김선실 목사님을 존경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늘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매우 심한 시대였다. 여성이 신학을 공부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딸로 태어나서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이 마음 아프구나. 나도 주의 종이 되고 싶었다.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어머니는 그 꿈을 늦은 나이에 기어이 성취했다. 그 분주한 상황 속에서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하시고, 몇 해 전 명예목사 안수를 받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만학에 힘을 실어준 아버지를 존경한다. 장로인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목회의 길을 걷는 어머니를 정성껏 도와주었다. 이런 좋은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예수 믿으세요”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최자실 목사님의 분신’으로 불려질 정도였다.
전국 여교역자회 모임인 상록회 초대회장을 지내셨다. 어머니는 성숙한 신앙과 리더십을 겸비한 분이었다. 지금도 조용기 목사님께서 가끔 어머니 이야기를 하신다.

어머니는 야간 신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최자실 목사님이 ‘화요 잃은양 찾기 기도회’를 인도하며 성도들의 구령의 열정을 독려했다. 여선교회 집사님들이 오전 10시 교회에 모여서 최 목사님 인도 하에 두 시간 동안 뜨겁게 기도 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노방 및 축호전도를 했다. 전도대원들은 교회 표지가 부착되지 않은 집의
문을 무조건 두드렸다.
“혹시 예수 믿으십니까?”
“아니요.”
이런 대답이 나오면 무작정 집으로 들어가서 30분이고, 1시간이고 전도를 했다.
그리고 상대방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전도는 계속됐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결국 불신자들이 두 손을 들고 만다. 이런 뜨거움이 없으면 전도는 불가능하다.
나는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이런 전도의 야성(野性)을 회복했으면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전도를 생명처럼 여기신 어머니
당시 어머니의 활동무대는 냉천동, 천연동, 현저동, 홍제동, 홍은동, 북아현동이었다. 아침에 기도회에 참석한 어머니가 전도하느라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셨다. 왜 늦느냐고 투정을 부린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만큼 어머니의 활동을 존중해주었다.

“네 엄마가 주의 일을 하느라 참 많이 바쁘단다. 너희들이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잘 챙기거라.”
아버지는 어머니의 전도활동을 적극 돕고 격려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매 주일 찾아오는 새신자들을 교회에 등록시키고 신앙생활을 보살피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전도를 사명처럼, 전도를 생명처럼 여겼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장을 찾아가 거래처 사장님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전도를 하셨다. 그분들 중 나중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가 되어 헌신하신 분들도 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여보, 막상 신학교에 가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너무 많아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도 있어요.”
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니가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 주의 종을 키우는 일이잖아요.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을 도우면 하나님이 사업장에 복을 주실 거예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수많은 학생들이 어머니를 통해 지원받은 전액장학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분들 중 나중에 훌륭한 목회자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순복음신학교 제18회 졸업식 때 공로상을 받았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이 있다. 지아비가 노래하면 아내가 그에 따른다는 말이다. 가난한 신학생들을 돕는 일만큼은 어머니가 먼저 제안하고 아버지가 그 뜻에 따르는 부창부수(婦唱夫隨)를 실천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갈 때까지 순복음교회 심방 전도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다. 나는 이런 부모님이 참 자랑스럽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앙의 유산이다.
그것은 녹슬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다. 신앙의 유산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영롱하게 빛난다.†

이영훈 담임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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