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기도원’에서 드린 감격의 예배(정두언 집사/전 19대 국회의원)

호희의 결혼: 대역전 드라마

그러다 집안에 고민거리가 생겼다. 큰 아이 호희가 짝이 생겨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결혼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서 결혼 날짜를 잡으라고 채근을 했다. 하루는 호희가 울며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는 왜 나를 빨리 쫓아내려 하느냐고. 그리하여 그나마 7월 5일로 날을 잡았다. 그런데 웬걸. 아니나 다를까, 5월 하순에 나의 대법 선고날짜가 6월 26일로 확정되었다. 나는 한 달 내내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며 선고 날을 기다려야 했다. 사랑하는 딸아이의 결혼식을 장례식 분위기로 치를 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매일 밤잠도 설쳤다. 그래서 일부러 매일 저녁 약속을 만들어 지인들과 밖에서 늦게까지 놀다 들어왔다. 6월 25일 저녁도 후배들과 함께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며 모임을 주관했던 친구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우리 모두 집에 가 자기 전에, 내일 두언 형에게 기적과 같은 결과를 내려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고 일어서려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자고 하며 얘기했다.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만일 내일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이 안 계시던가, 아니면 나쁜 분밖에 더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렇게 기도를 하면 안 된다. 이렇게 기도를 하자. 내일 어떠한 결과를 주시더라도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주소서. 설령 내가 바라지 않는 결과라 하더라도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계획의 일환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알겠어요? 부탁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다음 날, 6월 26일. 나는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법원 재판 개정 시간인 10시가 되자 가까운 지인 동지들이 속속 집으로 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들이 온 것은 결과를 함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시 무너질지도 모르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재판 결과가 무죄로 나올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이 내려졌다. 모두가 환호성을 터뜨렸으나, 오히려 당사자인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삼우제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2년간의 광야생활. 나는 다시 가나안 땅의 모퉁이에 서 있었다.

열흘 후, 7월 5일. 호희의 결혼식.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결혼식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알려야 할 분들에게도 축의금은 일절 사절하니 그저 축하만 해주시고, 시간이 되서 오시면 꼭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다. 식장이 있는 세검정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어 되돌아가신 분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우리가 결혼식에 가면 축하를 하러 간다. 더러는 의례적으로. 그런데 그날의 축하객들은 정말 진정한 축하를 해주었다.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가 가까스로 무죄를 받아 살아난 사내의 큰 아이 결혼식. 이 정도면 길을 지나던 사람도 축하할 일이리라. 바짝 말라 거의 피골이 상접하다시피한 모습의 신부 아버지에게 축하객들은 연민과 축복으로 범벅이 된 덕담을 진심으로 건넸다. 그리고 호희에게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신부가 복덩이다. 네 복으로 아빠가 무죄를 받았나보다.” 세상의 모든 딸이 그렇듯이 호희는 늘 우리 부부의 복덩이였
다. 하지만 이날 호희는 정말 세상의 어느 복보다 더 빛이 났다.

정두언 (서울홍성교회 안수집사/방송인/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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