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기도원’에서 드린 감격의 예배(정두언 집사/전 19대 국회의원)

관용과 인내

우리끼리 뜨겁게 찬양을 하고 있는데, 10시 쯤 되어 교도관이 나타났다. “의원님, 미리 나와서 차 좀 마시고 준비하다 나가시죠?” 딴에는 나를 배려해서 먼저 문을 따주겠다는 거였다. “아니에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있다 나갈게요.”

우리는 계속 찬송을 불렀다. 10시 반 경에 교도관이 다시 왔다. “의원님, 이제 나오시지요?” “좀 더 있다 나갈게요, 기다려주세요.”

우리의 찬양 열기는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11시에 다시 나타난 교도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순간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았고, 내가 남은 두 사람을 위해 기도를 했다. 정 처장, 김 부장 모두 엉엉 눈물을 쏟았다. 4개월간을 한솥밥을 먹으며 정든 우리였다. 떠나는 사람은 시원섭섭해서 남은 사람은 한이 맺혀서 나누는 작별의 눈물이었다. 2013년 11월 24일 밤 자정. 나는 열 달 만에 그렇게 국립기도원을 떠났다. 보통 사람들은 서울구치소 등 교도소를 ‘국립아파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구속돼 있지만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서울구치소를 국가가 세운 기도원이라는 뜻에서 ‘국립기도원’이라고 불렀다. 나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국립기도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밤. 나는 어느덧 어색해진 내 침대 위에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열 달 동안 내 기도의 열매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가? 혹독한 훈련을 기도로 견디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인내와 관용이라는 말이 줄곧 뇌리를 맴돌았다. 지지리도 참을성이 없고, 지지리도 포용력이 없이 살던 나였다. 나의 모든 실패는 다 거기서 나왔다 해도 무방하리라.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 것은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상황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였다.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참지 못해 미쳐버리거나, 참다가 죽을병에라도 걸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예배가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살자. 다시 살자.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의 상황은 이미 내가 바꿀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나를 바꾸는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참아야 한다. 그리고 용서해야 한다. 왜? 내가 살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 인내와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인내와 용서는 남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이요 베풂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정두언 (서울홍성교회 안수집사/방송인/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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