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등불이 된 진리의 복음

애국가--애국가는 찬미가 14장이었다

기 때 가장 먼저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愛國歌)이다.
뜻 그대로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부르면 그렇게 눈물 나고 코끝이 찡해지는 게 나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이런 애국가가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음을 알고 있는가.
우리나라 찬송가연구의 대가 오소운 목사를 통해 처음 찬송가로 불린
애국가에 대한 이야기와 궁금한 점들을 알아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애국가와‘기미가요(君が代)’

어느 날 내 친구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인데 일본 ‘기미가요’는 이런 뜻 아닌가.

임금님의 세대는 (君が代は),

천 대에 팔 천 대에 (千代に八千代に),

조약돌이 바위 되어 (細れ石の巖となりて),

이끼가 낄 때까지 (苔のむすまで)

이 가사에서 보는 대로 ‘기미가요’는 확장적이랄까 성장적이랄까 적극적인 기상이라 하겠는데, 우리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니 축소적(縮小的)이요, 소진적(消盡的)이요, 소극적(消極的)인 표현이라고 폄하하는 소리를 가끔 듣거든.”

“난 그렇게 생각 않네. 일본 국가는 첫째 비과학적이요, 둘째 진화론적이요, 셋째 봉건적일세.”

“어째서?”

“첫째, 조약돌이 자라서 바위가 되나? 바위가 부스러져서 조약돌이 되나?”

“아하! 그렇구나. ‘조약돌이 자라서 바위가 되어 이끼가 끼기까지’란 말은 말도 안 되는 넌센스지.”

“다음에는 조약돌이 자라서 바위가 된다는 생각은 분명히 진화론적 발상일세. 창조론에서는 ‘만물은 시간과 함께 퇴화한다’고 보는데, 진화론에서는 ‘모든 자연은 진화할수록 좋아진다’고 보기 때문이지. 그리고 봉건적이란 말은….”

“그건 설명 안 해도 알겠네. 임금님의 집안만을 위한 축복이니까. 그럼 우리 애국가를 분석해 보게.”

“우리 애국가는 첫째 성서적이요, 둘째 종말론적이요, 셋째 신앙고백적이요, 넷째 민주적이요, 다섯째 창조질서 보존적일세.”

“와아! 대단하군. 어디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첫째 성서적이란 말은 ‘동해물과 백두산도 끝이 있다’는 점이지. 불교의 우주관은 무한한 윤회(輪廻)로서 끝이 없다지만, 우리 그리스도교는 ‘때의 종교’로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유한(有限)한 우주 안에서의 삶을 가르치고, 하늘나라만이 영원하다고 가르치고 있질 않은가.”

“맞아! 둘째는 종말론적이라고 했지?”

“앞의 말의 연장이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면, 우주의 종말 아닌가.”

“세 번째는?”

“이 우주의 종말이 오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우하신다’ 즉 보살피시고(保) 돌보신다(佑)는 신앙 고백 아닌가.”

“맞았네! 그러고 보니 애국가의 가사는 정말로 좋은 가사구먼!”

“더 있네. 일본 국가는 ‘임금님의 세대는…’ 하고 한 왕가(王家)의 융성만을 노래하지만, 우리 애국가는 ‘우리나라 만세!’ 아닌가. ‘우리’, 온 국민! 얼마나 민주적인가! 뿐만 아닐세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保全)하세’란 말에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대로 이 땅을 돌보고 가꿔야 할 우리의 사명이 담겨 있다네.”

윤치호의‘찬미가, 1908’

1905년에 윤치호 장로는 <찬미가>라는 작은 책을 내었다. 자기가 소속한 남감리회를 배경으로 1906년에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현 송도고등학교)에서 ‘찬미가’의 애국찬송을 가르치며 애국찬송 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초판은 찾을 수 없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작고하신 아버지 친구 최거덕 목사님에게 물려받은 재판(1908년)이다. B5판(182×257) 용지 9매에 좌우 두 쪽씩 실어 한 면만 인쇄한 후 이를 반으로 접어, 옛날 책 매는 방식으로 매었다. 오른 열기에 세로짜기를 했고 역술자(譯述者)는 윤치호, 발행자는 김상만(金相萬), 값은 2전 5리이다. 머리말이나 차례 따위는 없고, 15곡이 실려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4장이다. 옆 그림에서 보이는 대로 영문 노래 제목은 Patriotic Hymn, 곧 ‘애국 찬송’이다. TUNE은 AULD LANG SYNE인데 가사는 현 애국가 가사와 일치한다.

윤치호 장로는 애국 찬송으로서 이 가사를 썼다. 곡조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애창하던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에 쓴 스코틀랜드 민요곡 AULD LANG SYNE이다. 이 곡조는 5음계 곡조로서 5음계에 익숙한 선열들이 애창하는 곡조다. 그래서 해방 직후, 안익태의 곡조가 알려지기까지 우리는 이 곡조로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

애국가 작사자로 거론되는 이는 윤치호와 안창호다. ‘어머니의 넓은 사랑’(304장)을 작사한 주요한은 경향신문(1955. 4. 19)에 기고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춘원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에게,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지요?” 하고 물었을 때, 도산이 소이부답(笑而不答, 웃기만 하고 대답지 않음·필자 주) 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혹은 그 시절(1907년·필자 주)의 안·윤 양씨의 합의로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주요한의 ‘안창호와 윤치호의 합작설’은 지금도 여기저기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안창호와 윤치호는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평생 딱 한 번밖에는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이 없다.

윤치호는 1935년 3월 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윤치호 일기>626쪽).

오후에 중앙호텔에 머물고 있는 안창호씨를 방문하였다. 그를 단독으로 면담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극심한 반남(反南) 파벌주의자라는 내용으로 자기에게 쏟아지고 있는 비난을 반박했다. 그의 설명이 모두 사실이라면, 안씨와 관계를 끊은 쪽이 오히려 이승만 박사였다. 그는 달변가였다. 그는 조선인들에게 지역적 적대감을 부추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로 자기 얘기를 마무리했다.

두 사람이 같은 민족 지도자이면서 평생 한 번밖에 독대할 기회가 없었던 이유는,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뿌리 깊은 지역감정 때문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온갖 벼슬은 일부 양반 계급인 ‘기호(畿湖)사람들’(서울, 경기, 충청 사람·필자 주)이 독점하였고, 서북사람들(평안도, 황해도 사람들·필자 주)은 완전 소외되어 왔다. 윤치호는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니 기호사람이고, 안창호는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으니 서북사람이다. 그때 상황을 <윤치호 일기>(1933. 10. 4.)에서 보자.

(전략) 그런데 안씨는, “일본인들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적이지만, 기호인들은
500년 동안 서북인들의 적이었으므로,
먼저 기호파를 박멸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 안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호파 인사들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있으며, 안씨가 이보다 더한 말도 했다고 믿고 있다….

이런 두 지도자가 애국가를 합작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환상일 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대로, 윤치호는 친필로 자신이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했음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자료 추가 발굴
이와 더불어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를 썼다는 자료가 추가로 발굴됐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아래는 2013년 6월 18일 조선일보 기사이다.

6·25전쟁 직후 미국에서 발간된 한국 소개 영문 소책자가 윤치호(1865~1945)를 애국가 작사자로 밝힌 사실이 확인됐다.

한국태평양출판사가 1954년 11월 발간한 ‘한국 입문(Introduction to Korea)’에 ‘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 악보를 싣고 작곡자를 안익태, 작사자를 윤치호로 기록한 것. ‘한국입문’에 실린 애국가. 왼쪽 상단에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밝혔다.

이 책자는 한국 홍보용 자료로 제작된 것으로 이현표 전 주미 한국 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이 수집했다. 이승만 대통령 고문을 지낸 올리버 박사가 운영한 한국태평양출판사는 당시 한국 정부의
대미(對美) 홍보 창구 역할을 했다. 2000년대 들어 미국 LA종우서관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1931년), 미국 적십자사가 펴낸 ‘National Anthems’(1952년) 등 윤치호를 작사자로 기록한 애국가 악보가 잇따라 발견되면서 ‘윤치호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윤치호설’ 옹호론자들은 “윤치호는 1907년 애국가를 작사했고, 1908년 발행한 <찬미가>를 통해 보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창호설’ 옹호론자들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으며, 도산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앞장서 보급했다”고 밝혀 왔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55년 윤치호 단독 작사설을 표결에 부쳤으나 찬성 11, 반대 2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해 유보됐다.

애국가 처음 부른 베를린 올림픽 선수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6년 6월경에 작곡을 마무리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해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됐다. 올림픽 경기장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중들과 베를린 시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 국가가 연주됐다. 독일 관중의 환호성이 솟구쳐 올랐다. 그 일본 선수단에는 건장한 조선 청년 7명이 끼어 있었다. 마라톤의 손기정·남승룡, 농구의 장이진·염은현·이성구, 축구의 김용식, 권투의 이규환 등이었다.

안익태는 입장식이 끝나자 이들을 찾아가 얼싸안고 인사를 나눴다. 그는 준비해 간 애국가 악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입니다. 우리 민족의 응원가입니다.”

안익태는 그들 앞에서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안익태의 선창에 따라 선수들은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은 가사를 베껴 적었다.
모두들 이 의외의 만남을 기뻐하였다. 이 극적인 비밀 집회는 아무 탈 없이 끝났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세계 어느 나라 국가에 이런 구절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살피시고(保) 돌보시는(佑) 동방의 ‘택한 백성’, Chosen People이다. 어떤 목사는 윤치호 장로가 ‘하느님’이라고 작사했으니 표준어대로 [하느님]이라 부르자고 하는데, 찬미가나 친필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썼다.

하늘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키시고 돌보신다. 주님 오실 때까지….†

오소운 (목사)

<21세기 찬송가 해설> 저자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