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숯장사·조선사대부 ‘신앙 동지’ 되다

작성일2018-11-18

전덕기(1875∼1914·왼쪽)와 이회영(1867∼1932)

서울 중구 한국은행 앞 사거리. 우리 역사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다. 특히 조선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시공간으로 한정지어 놓고 볼 때 뼈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이 로터리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리를 조성, 조선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보자면 북서쪽으로 경복궁, 북쪽으로 조선 사대부들의 공간 북촌, 서쪽으로 숭례문, 동쪽으로 청나라 사람들 주거지 명동, 남쪽으로 남산이 자리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은 조선의 사대부였다. 그의 가문은 조선 내내 왕가와 혼인을 맺으며 명문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나라에 충성했고 효를 행함으로써 백성의 신임을 받았다.

서울 명동성당 정문 맞은편에 기독여자청년회(YWCA) 회관이 있다. 이회영가는 대대로 이 일대를 소유한 사대부였다. 명동부근 수령 150년 남짓의 은행나무가 그의 아버지 이유승(이조판서)이 심은 것이라 한다. 어머니 정씨도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었다. 명동과 저동 일대 땅을 소유한 아흔아홉 칸 대감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울 북창동 땅과 황해도 개풍군 인삼밭도 소유하고 있었다.

명동성당 남쪽 방향으로 주한중국대사관이 있다.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명·청나라를 섬겼다. 그 명·청 사신들이 명례방(명동)을 이뤄 살았고 외세 권력의 중심이 됐다. 임금과 사대부들은 당연히 명례방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이회영도 청나라 정치가로 조선에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온 위안스카이(원세개·1859∼1916)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그런 이회영은 목사 전덕기(독립운동가·1875∼1914)를 만나기 전까지 뼛속 깊은 조선사대부였다.

사대부 이회영이 접한 ‘자유와 평등’

전덕기는 숯쟁이 집안 출신으로 고아나 다름없었다. 조실부모하고 삼촌 도움으로 남문안장(남대문시장)에서 숯장사를 하며 사고나 치던 상놈에 불과했다. 그가 이회영과 같은 지체 높은 양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남문안장과 저동 이회영 집이 1㎞ 남짓이었다.

지난 11일 서울 상동교회 건물. YMCA운동가 전택부 선생이 신앙과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 예배당이 교상(敎商)복합건물(1970∼80년대)이 된 것을 세속화라며 통탄했듯 저층 대개는 임대 상가였다. 19세기 말 예배당이자 기독교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한 공옥학교(초교과정) 상동청년학원(중·고교과정) 그리고 민중병원(시약소) 터였고 또 전덕기 이회영 이동녕 등 이른바 ‘상동파’들의 독립운동가 본부였던 곳이다.

이회영은 20대 초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여준(1862∼1932) 등과 합숙하며 수학 역사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던 유교지식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한국인으로 그의 가문을 칭송한다.

그는 30대 초반 개풍에서 삼포농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 이상설, 아우 이시영(1869∼1953) 등과 을사늑약 파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운동 차원으로 국권 회복이 어려워지자 을사오적 척살도 모의했다.

전덕기는 1900년대 초 상동교회 협동목회자가 됐다. 그리고 1904년 10월 상동교회 청년회 이름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전덕기가 상동교회 속장 및 유사가 되어 활동하던 1898년 무렵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덕기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연사로 참여했다. 그는 남문안장 장터에서 빼어난 웅변으로 망국에 처한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선지자의 목소리였다.

“그가 장터 연설에 나서면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몰렸어요. 신분사회에서 평등과 자유를 이야기하니까요. 민중이 술과 담배를 끊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개명한 시대에 상놈과 양반이 어디 있느냐는 거지요. 나아가 결코 일본 사람들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거였죠.”

상동교회 내 민족교회연구소 김종설 국장의 얘기다. 만민공동회 연사 전덕기의 웅변은 장안에 금세 퍼졌다. 서양 문명의 합리적 생활양식 권장 내용도 계몽적 연설에 담겼다. 자연히 위생 보건 교육 신분차별 등이 거론됐다. 복음에 근거한 메시지였다.

“이회영은 국권 회복을 위해 만민의 힘을 모으던 숯쟁이 출신 연사를 주목했어요. 그가 어떻게 저런 새사람으로 변했을까 하고 따져보니 상동교회와 선교사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전덕기가 말하는 자유와 평등을 깨닫고자 했어요. 야소교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심어준다는 걸 알았죠.”(김종설 국장)

예배당에 돌 던지던 소년 전덕기

이회영은 신분과 장유유서 관습에 크게 벗어남에도 불구하고 전덕기를 찾아 예를 표했다. 그는 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이내 민족적 자각에 뜻을 같이했다. 이회영은 전덕기가 갖는 대중적 연설이 국권회복운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전덕기가 대중의 언어로 연설하는 것을 사대부 엘리트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전덕기는 가난하고 핍박 받는 자를 이끄신 예수를 소개하곤 했다.

이회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리고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부임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이회영은 2년여간 서구식 과목을 개설하고 지도했다.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한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 실기’에서 “우당은 상동교회에 다니며 세례를 받고 성경공부를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상동교회는 평민들이 모이는 독립운동 요람이었다. 이회영 이동녕 김구 이준 이상설 신채호 노백린 남궁억 최남선 양기탁 주시경 이상재 이승만 등이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상동교회 비밀 아지트에서 을사늑약 반대 ‘도끼상소’와 오적척살을 모의했다. 또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구국운동에도 전력했다. 김종설 국장이 이어갔다.

“예수를 영접한 조선 엘리트들은 신민(新民)이 됐습니다. 신민이라는 게 뭡니까. 거듭난 새사람 아닙니까.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는 전덕기 이회영 등 상동파가 뿌리입니다. 신민회는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지만 그 근간에 자유와 평등을 앞세운 기독교 사상이 자리했던 겁니다. 그 성서적 메시지를 전덕기 목사가 전했고 이회영 등이 실천에 옮긴 겁니다.”

전덕기는 예수를 믿기 전 달궁교회(상동교회 전신) 유리창에 돌을 던지던 소년이었다. 달궁은 지금의 한국은행 본관 일대로 세도가 달성서씨의 달성궁이 있었다. 선교사 스크랜턴과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화여대 설립자)이 일대에 교회와 사택 그리고 시약소와 학교를 세웠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유리창을 깬 범인을 잡고 보니 16세 소년이었다. 바로 전덕기다. 그는 온유한 미소로 다가가 소년을 용서했다. 이에 충격 받는 전덕기는 온유한 미소에 이끌려 예배당에 발을 들였다. 예비하신 이끄심이었고 그리고 예비하신 만남이 이어졌다.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 오전 상동교회에서 뜻 깊은 행사가 열린다. ‘우당 이회영 선생 86주기 추모식 및 장학금 전달식’이다. 추모식은 기도 및 설교 등으로 이어진다. 장학금과 독립운동사 연구공로자에게 연구비가 수여된다.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 전 국회의원이 전달한다.

▒ “상동교회학교 , 팔도 운동자들 기관소”

우당장(남편 이회영)은 남대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근무하시니 그 학교 선생은 전덕기 김진호 이용태 이동녕씨 다섯 분이다. 이들은 비밀독립운동 최초의 발기인이시니, 팔도의 운동자들에겐 상동학교가 기관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라.

종조 해관장(할아버지 남자형제인 독립운동가 이관직)이 상동교회학교 안에 애국자들이 모여 결사운동한다는 소문을 듣고 학교로 찾아와 우당장을 면회 후 시시로 방문하여 주의(主義)가 합하여 친밀하여 공사간 의논했다. (부인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중에서)

◆ 전덕기
·1875년 서울 정동 출생
·1889년 남대문시장 숯장사
·1892년 스크랜턴가에 고용됨
·1896년 주시경 이승만과 독립협회 가입
·1901년 상동교회 목회 시작
·1902년 아펜젤러 순직예식 대표기도
·1904년 상동청년학원 설립
·1905년 이회영 등과 을사오적 척살 모의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지원
·1909년 경성고아원장 취임
·1914년 상동교회 사택서 소천

◆ 이회영
·1867년 서울 저동 출생
·1885년 이상설 등과 신흥사서 수학
·1905년 전덕기 등과 을사오적 척살 모의
·1908년 상동교회에서 이은숙과 신식결혼
·1910년 노비 해방 후 재산 정리 남만주로 망명
·1911년 베이징에 독립군기지 설치
·1919년 임시정부 참여
·1924년 의열단 지원 및 아나키스트운동 주도
·1931∼32년 일본공사관 폭파 등 무장투쟁
·1932년 다롄서 체포 된 후 고문당한 끝에 순국

글·사진=전정희 논설의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33398&code=2311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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